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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그늘 아래에서

by 이혜연


산 언덕배기

햇살 좋은 곳에

봄이면 연분홍 꽃무릇이 우거져

옛 시인들은 그곳에서

시를 나눴고

걸출한 인재들은 모여

죽어서도 깨어지지 못할 사내들의

약속을 맹세했다지


사람의 노래와

마음의 결기가

꽃잎처럼 흩어진 곳에

뜨거운 여름이 들어서면


포근한 가슴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육즙이 터지는

복숭아가 주렁주렁

가지를 늘어트린 채

햇살에 매달려 있었는데


오늘 마트에 나가보니

붉고 매끈한 천도복숭아만 여럿이고

순결한 처녀 가슴 같은

봉긋하고 부끄럼 많은 털복숭아들은

보이지 않네


그 언덕 흐드러지던 꽃들과

풍만하고 여렸던 복숭아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장마 중간중간 햇살 있는 날은 끈끈한 습도도 견딜만하다. 끈적하게 불어오는 바람이라도 밖에서 불어오는 새로운 결이 눅진하게 눌러앉은 끈끈함을 조금은 날려주기 때문이다.


아이들 어렸을 때는 복숭아 잔털에 혹여 알레르기가 발생할까 봐 조심하고 경계하며 먹였었다. 요즘은 뽀드득 씻어주면 보드라운 속살에 입안 가득 달큼한 육즙에 빠져 이제 일인에 복숭아 하나는 우습게 먹곤 한다. 과일을 좋아하는 식구들은 장마가 더욱 달갑지가 않은데 맛도 떨어지고 습도에도 무르기도 잘 물러 멍도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엊그제 제주에서부터 북상한다는 장마구름을 하루치 앞서서 이것저것 종류별로 과일을 냉장고에 채워두었더니 마음도 든든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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