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혜연 Aug 19. 2024

가려진 틈사이로

가려진 틈  사이로

아이들과 어제 밤늦게 귀가하는 길에 태풍 같은 거센 비바람을 만났다. 겁 많은 둘째는 처음 경험하는 마귀 같은 바람과 야생의 천둥과 번개, 그리고 묵직하게 때려대는 비를 맞고 놀래서 내 등에서 두려워 떨며 울어댔다. 다행히 자기 자전거를 타고 따라오는 첫째는 내 뒤를 놓치지 않고 잘 따라와 줬다. 5분도 안 되는 길을 가는데 앞이 안보일정도로 비가 오는 데다가 바람이 자전거를 흔들어대서 아이들이 위험할까 봐 석촌호수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홀딱 젖은 엄마와 아이들. 물이 뚝뚝 떨어진 채로 편의점에 들어가는 게 눈치가 보여 추워하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음료수를 사주려고 혼자 문을 열었다. 그랬더니 야간 담당이신 듯 중년의 점원분이 아이들 물기 닦아주라며 수건을 건네주시며 아이들도 들어오라고 해주셨다. 너무 많이 젖어서 바닥에 물기가 많이 떨어질 것 같아 안된다고 하니 빈 상자를 입구에서부터 쭉 깔아주시고 끝에 앉을 의자에도 상자를 덧대주셨다. 따뜻한 마음씨  덕분에 갑작스러운 폭우로 얼었던 마음이 따스하게 녹아내렸다. 맹렬하게 퍼붓는 비를 보며 마시는 코코아의 달콤한 안온감이 색다른 행복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따스한 배려 속에 쉬다가 조금 누그러진 비에 아이들에게 우비를 사서 입히고 집으로 돌아왔다. 


머리를 감기고 드라이로 뽀송하게 말려준 뒤 마사지를 해주며 책을 읽어주다가 오늘 있었던 급작스러운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얘들아, 살다 보면 오늘처럼 갑작스럽게 몸도 못 가눌 정도의 비바람을 맞을 때가 있어. 그런 건 너희들이 잘못했거나 너희에게 죄가 있기 때문에, 혹은 너희를 미워해서 맞게 되는 일이 아니야. 그건 그냥 비와 바람이란다. 때가 되었을 뿐 어떤  다른 의도는 없어. 그런 때엔 그냥 네 길을 가면 된단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왜 나한테만,..이라는 말들은 의미가 없어. 꿋꿋이 자기가 정한 길을 걸어가되 힘들어지면 오늘처럼 잠깐 쉬어갈 곳을 찾으렴. 거기서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며 몸을 녹이며 휴식을 갖다가 우비도 챙겨 입고 다시 비를 맞으면 돼. 그럼 오늘처럼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어. 알았지?"

 

다행히 8살 9살 형제는 엄마의 말과 속뜻을 이해해 주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해준 그 말에 엄마인 내가 가장 많은 위로를 받았다는 걸 잠결에 언뜻 깬 새벽녘에 깨달았다. 아! 나는 지금 예비하지 못한 빗속을 걷고 있구나. 잠시 쉬다가 다시 내가 정한 길을 묵묵히 걸으면 되는 거구나. 나는 지금 벌을 받거나 내가 해명해야 하는 어떤 죄속에 있는 게 아니라 계절이 변하려는 변곡점을 지나고 있을 뿐이구나. 그러니 오늘 달콤하게 나를 위로하고 다시 내 길을 걸으면 되는 거였구나. 새벽녘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감사인사를 보냈다. 너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덕분에 스스로 깨닫게 해 주어서 정말 감사해. 너희 덕분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