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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가을

by 이혜연
소녀의 가을

한참 동안 쨍하게 말라있던 하늘이 우울한 회색빛으로 물들더니 비가 온다는 말이 무색하게 가을 속으로 스며들듯 공기를 적시는 아침이었다. 우산을 쓰고 달리기는 어려울 것 같아 후드티와 반바지를 입고 나왔다. 젖은 낙엽이 으깨져 종아리 언저리에 파편처럼 박히는 길이었지만 어쩐지 깊은 가을 속을 내달리는 기분이 들어 멈출 수가 없었다. 식단과 운동을 한지 일주일이 지나니 몸도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고 무엇보다 뛸 수 있는 거리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어 더 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만들었다.

근력운동 후 목도 축일 겸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곤 하는데 항상 테이크아웃만 하다가 오늘은 비에 그쳐 매장에서 마셨다. 같은 처지의 사람이 많았는지 평소엔 한가하던 카페 안이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분주해졌다. 가끔 평일 아침에 이렇게 운동을 하고 가볍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행복이 주어진 것에 대해 말할 수 없는 행복이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만 해도 새벽 2시도 안돼서 잠이 깨면서 다시 잠들지 못하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4시쯤 화장실에 가려던 신랑과 마주쳐 잠이 안 온다고 했더니 조금 더 자라며 재워주어 설풋 어설픈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어지럽게 헤매다 아침을 맞이했다. 이렇게 어지러운 아침도 그렇게 두렵지 않게 된 건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실수에 대한 너그러움 덕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홀로 생활전선에서 애써주는 옆지기 덕분이라는 것도 항상 감사한 일 중에 하나다. 더불어 잠 못 드는 날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침대 모서리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닌 해야 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도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다. 행복이란, 어떤 행위의 누적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가을날이다.


"언제부터인가 운명 같은 것에 굴복한다는 것이 고상한 게 아니라 비겁함의 징표가 됐다. 행복이란 게 모두가 달성해야만 하고 달성할 수 있는 것이고, 그걸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타협은 무엇이든 본인의 잘못인 것만 같은 지금, 행복을 쟁취해야 한다는 압력에 가끔 거의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다 - 리틀 라이프 중에서"




호수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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