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전라북도 끝쪽이라 생활권이 광주와 가까웠다. 1980년 대는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기로 방학 때는 흰 편지 봉투에 잔디씨를 채워오는 숙제가 있었고 가을에는 코스모스 씨를 채워가야 했다. 열 맞추어 교실바닥에 광을 내기도 했고 평화의 댐 건설 때는 반친구들과 리어카를 몰고 다니며 유리병 같은 걸 주워다 팔아서 성금모집에 나가기도 했었다. 이제 막 마을에 미닫이로 열고 닫는 텔레비전이 집집마다 한 대씩 놓이고 있을 때였다. 그때는 학교에서는 선생님이란 권력자 앞에, 읍내에서는 읍장의 권위 앞에, 마을에서는 새마을 운동을 통해 얻어진 이장이라는 우두머리 앞에 이유 모르게 마음을 졸이는 시기를 살고 있었다.
우리는 4km가 넘는 비포장 도로를 걸어서 학교에 가곤 했는데 기억에 남는 사건 중 하나가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던 해의 선거기간이었다. 우리는 지척에 있었지만 광주에서의 일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다만 냇가에서, 논에서, 고샅에서 어른들끼리 하시던 말씀에 따라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이 되면 전라도는 전쟁터가 될 것이라는 흉흉한 소리에 괜스레 진짜 전쟁이 나서 부모님과 헤어져 살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 태산인 채로 등교를 하곤 했다는 게 기억의 전부다.
그렇게 잊혀 있던 일들은 대학교에 와서야 더 자세한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제대로 된 관심을 두지 못했다. 이미 지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가끔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너무 빨리, 가볍게 잊음으로써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잠깐씩 들기도 했었다.
최근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그의 소설 중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 책을 읽어보고 싶어 도서관에 갔더니 모두 대출 중이어서 다른 책들을 대여해 왔다.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다른 책들을 대여하기로 했다. 최근 과학 소설 '삼채'를 읽고 있었는데 진도가 안 나가 오늘은 '리틀라이프와 '마션'을 대여해왔다.
가을이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이미 반 이상 흘러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가슴을 스산하게 한다. 묵직한 책으로 바스락 거리는 가슴을 잡아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