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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연 Nov 08. 2024

가을에 대하여

가을에 대하여

요즘 장을 보는 가락시장에는 수산물을 사는 곳, 과일을 사는 곳, 축산물을 사는 곳이 한 곳씩 정해져 있다. 낯선 사람들과 말도 잘 섞고 별로 두려워하는 건 아니지만 실제로는 꽤나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에 항상 어디서든 단골을 만들고 그곳에 충성을 한다. 그러다 보면 오늘처럼 단감이 별로 맛없는 게 들어왔으니 다음에 맛있는 거 들어올 때 사가라고 한다든지 조금 더 좋은 물건을 권유받기도 한다. 그런 솔직한 마음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장님에 대한 충성으로 다음에 다시 그곳을 방문하는 것뿐이다.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수산물을 사러 갔는데 내 앞에 연세 많은 할머니가 작은 시장바구니를 들고 오셔서 이것저것 사는 모습을 봤다. 내 차례가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다 보니 사는 물건이 적지 않았다. 알이 굵은 전복들을 모두 싹쓸이하시더니 자연산 홍합을 긁어담으셨다. 그 모습이 흥미를 끌어 넌지시 장바구니에 홍합 담는 걸 도와드리면서 여쭤보았다. "식재료를 한꺼번에 사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 그랬더니 할머니 왈 "일하는 아줌마가 식재료 없으면 짜증을 있는 대로 내니까 쟁여놔야 해." 모르고 지나쳤으면 노점상을 하실 것 같은 행색이었지만 눈빛이 단호한 게 호기심을 동하게 만들었다. "내가 85살인데 일하는 아줌마가 아주 야무져서 5년째 함께 하고 있어. 식구가 셋인데 다들 따로 밥을 먹으니 세 번씩 상을 차려야 한다며 불만이 있지만.." 그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 살이 오동통 오른 병어를 다시 싹쓸이 주문하셨다. "에휴... 할머니가 좋은 거 다 가져가셔서 전 뭘 사야 할까요?"이렇게 실없는 농담으로 할머니에게 말하니 뭔가 승자의 웃음을 흘리시며 좋아하셨다. 


할머니와의 만남으로 처음 해외여행을 갔던 방콕에서의 일들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패키지여행을 가면 항상 일정 부분 쇼핑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쇼핑이라는 것이 강제는 없었지만 눈치가 꽤 보이곤 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부터 가이드의 은근한 압박이 있었는데 그걸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사십여 명의 일행 중 예쁘게 차려입으신 분들이 꽤 있었지만 나중에 방콕의 백화점을 나설 때 가장 비싼 물건을 많이 사신 분은 여행 내내 몸빼 비슷한 옷을 입으신 분이었다. 옷차림만 보자면 그렇게 고가의 물건을 살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분이었다. 


돌아보면 주위의 건물을 가지신 분들 중에서도 20년이 넘은 소나타를 애지중지 타고 계신 분도 계시고 카페를 직접 하거나 60대이신데도 영어 번역일을 꽤 열심히 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아마 그분들은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 고문이라고 느낄 만큼 대부분 몸을 쓰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던 것 같다. 한가하게 멍 때리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배울 점이 많은 분들이었다. 


가을은 풍성한 열매가 가득한 날들이다. 세입자분들이 시골에서 보내준 대봉감을 주기도 하고, 아이들 쓰라고 우산을 주시기도 하고, 아이들 음료수를 현관문 앞에 두고 가는 분들도 계셔서 덕분에 나의 가을도 풍요로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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