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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어제를 꿈꾸다

by 이혜연
오십, 어제를 꿈꾸다


"엄마, 여기는 왜 와보고 싶었던 거야?"


브런치 베리티 작가님의 글을 읽고 서소문 아파트를 가보고 싶어졌다. 인간 냄새가 진하게 났던 드라마와 영화들 중에 이 아파트를 배경한 씬들이 빠지지 않았었다. 언젠가 가봐야지 했는데 곧 재건축도 된다 하고 작가님의 글을 따라 그 길을 걸어보고 싶기도 했다. 신랑이 운전을 못 하는 나를 위해 주말마다 가고 싶은 곳을 말하라고 하고 데려다주는데 오늘은 이 허름하고 낡아버린 채 꿋꿋이 세월을 거스르며 서있던 어제의 길 위의 잔상들 속을 거닐어 보고 싶었다.


차멀미를 하는 연년생 형제는 오는 내내 뒷좌석에서 서로 기대 잠이 들었다. 근처에 주차를 시키고 걷는데 도심 한복판을 가르는 철도가 새삼 생경스러웠다. 그렇게 지난 세월을 가늠할 수 있는 건물들을 이정표 삼아 둥그스름한 호를 그리고 있는 천장 낮은 아파트를 찾아갔다. 걸으면서 겨우 잠이 깬 두 아이가 아파트를 보더니 "엄마, 이게 왜 그렇게 보고 싶었던 거야?"



그러게...

삐까뻔쩍하게 솟아오른 오늘의 건물들 사이로 낮고 볼품없이 다닥다닥 작은 숨구멍 같은 창문으로 겨우 숨 쉬고 있는 이 건물이 조만간 사라지든 말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이렇게 꾸역꾸역 찾아왔을까.


영화 센과 치히로의 모험을 보면 작은 비석하나가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석이 된다. 그 하나를 두고 치히로는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린 채 센이 되어 유곽 같은 목욕탕의 잡부가 되고 다른 사람을 돕고 모험을 하다가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내 부모와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어느 때 내 젊은 시절은 머릿속에서만 희미하게 기억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예전의 낡은 건물, 좁은 골목길, 덜컹거리던 나무 창문을 만나면서 생생해지기도 한다.


젊음이 희미해지는 나이, 오십이 넘어 다시 싱그럽던 푸른 시절이 그리워진 걸까? 아니. 그립지 않다. 아등바등 끝도 없는 진창에 빠져 갈구하고 버둥대고 애탔던 날들로 다시 돌아가고픈 그리움 따위 없다. 지금껏 결과 없이 한걸음, 한걸음 온 힘을 다해 걸어왔던 그 길에 실패와 후회가 수만 가지라도 다시 그 걸음을 돌려 그 이상의 무엇을 위해 싸우고 싶지 않다.



오늘 내가 이렇게 낡은 길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한 이유는 그 추운 계절을, 고단하고 힘겨웠던 어제의 오늘들을 잘 견디고 지금껏 살아있음을 기억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그때처럼 밤을 새워서 고민하지도, 새벽녘을 간절한 기도로 꽉 채우진 못 하겠지만 조금 느려진 걸음과 느슨한 마음이어도 아직 꿈을 꾸는 걸 잊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어제로 이어진 길 위로 오늘을 걸으면서 아직 닿지 않은 저 하늘을 꿈꾸는 것도 나쁘지 않음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며 오래된 육교를 올랐다.


하지만 서소문 아파트만으로는 왠지 허전해서 신랑에게 아이들을 부탁하고 홀로 낡은 건물들이 놓인 좁은 골목을 할 일 없이 헤맸다.


그러다 발견한 카페.

수제 밀크티가 시그니처라는 문구에 홀린 듯 들어갔다. 좁은 입구에 비해 매장 안은 넓고 좌석도 많았다. 일요일 오후라 사람이 몇 없었고 음악은 잔잔해서 좋았다.

얼그레이 밀크티

찻 주전자를 낮게 기울여 밀크티를 잔에 채우고 나니 이제 어제의 세계를 나가야 할 때라는 게 느껴졌다. 오래된 건물에서 시작해서 달콤하고 잔잔하게 퍼지는 느린 오후의 끝에서 다시 오늘은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오늘의 꿈을 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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