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애태우던 비가 조금은 더디게 그러나 또 한편으로 알맞게, 아침부터 오후 내내 내립니다. 어렸을 적 시골집 마루에 앉아있으면 앞산 위로 안개구름이 이생의 것이 아닌 듯 투명하게 하얀 띠를 두른 채 산을 감추고 있어서 보고 있어도 현실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봄 비가 오는 날, 보랏빛 자운영이 흐드러지게 핀 논 위로 하얀 망사 같은 아지랑이가 피어 그 모서리 끝을 살짝 잡고 들어 올리면 내가 모르는 다른 것들이 살고 있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상상도 했었었죠.
도심의 봄비 속에서도 대지 여신의 숨은 하얗게 빌딩을 감싸고 그런 날은 조금만 길을 잃어도 다른 것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반복되는 삶을 살면서도 항상 다른 길을 원하며 꿈꿉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고, 체셔 고양이에게 묻듯 길을 묻고, 저 장막 너머로 한 걸음을 옮겨보기도 합니다. 오십이 넘어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결정보다는 스스로의 삶을 위한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는 적정한 타협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길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선택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 길은 항상 열려있음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