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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 Oct 17. 2023

밤산책 2

유일한 노후 계획

오늘 저녁에도 셋이 산책을 나갔습니다.


저는 달수씨가 살이 많이 쪄서 뒤뚱뒤뚱 걷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개가 비만이라 정말 걱정이야.     

 

으응, 어쩔 수 없지. 비만으로 인해 성인병이 오면 예정보다 좀 빨리 가는 거지. 뭐.


그 순간 하마터면 당신이야말로 그렇게 입방정 떨다가 내 손에 잡혀 예정보다 일찍 가는 수가 있다고 말할 뻔했습니다. 심지어는 무심결에 튀어나올까 봐 두 손으로 입을 꼭 막아야 했습니다. 요새는 하고 싶은 말을 참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가난뱅이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심술쟁이 노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게 제가 세운 유일한 노후 계획인데 벌써 차질이 생기면 곤란합니다.


달수씨가 똥을 누자 언제나처럼 남편은 나에게 잠깐 개끈을 맡기고 개똥을 싹싹 치웠습니다. 그리고는 개똥 봉지를 내게 주고 다시 개끈을 돌려받았습니다. 자기가 대장이니까요.


똥을 누고 난 후 개운한 얼굴의 달수씨


남편이 묵직한 개똥 봉지를 건네주면서 이번에 신경 써서 배변봉투를  손잡이 있는 걸로 샀더니 들고 다니기에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고 생색을 냈습니다.


제 반응이 심드렁하자 남편은 좀 답답해하면서 그러지 말고 개똥 봉지를 좀 잘 보라고 하면서 손가락에 끼워보라고 그럼 얼마나 편한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재촉했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속에서 엄청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아니야, 참을 수 있어.

그럼,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어.

그래도 한 번만 얘기하면 안 될까? 말투를 부드럽게 하면 되잖아.

도저히 더는 못 참겠다.


저는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음, 만약에 어떤 남편이 엄청나게 생색을 내면서 아내의 손가락에 무언가를 끼워보라고 재촉하는 일이 있다고 해봐. 그러면 대개의 경우 상당히 높은 확률로 그게 개똥 봉지는 아닐 것 같은데...


남편이 잠깐 뭘 생각하는 척하다가 옛날 옛날에 사줬던 누런 금목걸이를 떠올리고 그걸 사주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걸 하고 나갔더니 다들 자기네 할머니 목걸이랑 똑같다고 놀렸어. 그래서 하고 다니지 않는 거야. 요새 사람들이 많이 하는 보석이 뭔지는 알고 있어?


이렇게 말할 뻔하다가 이번에는 용케 참았습니다.


손잡이가 있는 개똥 봉지가 들고 다니기 편한 건 사실이니 이번 한 번은 봐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심술쟁이 할머니는 되고 싶지 않다는 유일한 노후 계획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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