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게임을 하는 이웃이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가끔 소리를 크게 지르는데 마치 경기에서 극적인 역전승의 순간 나오는 환호성과 같다. 문제는 소음이 아닌, 같은 시간 온 힘을 다해 작업하는 나에게 오는 타격감이다. 창작의 고통을 짊어지고 거북이걸음 같은 속도로 일하는 나보다 매일 웃으며 사는 그가 궁극적으로 더 행복한 삶을 사는 듯 보였다. 그와 대화해 보면 딱히 이루고 싶은 것도 없고, 여유 있는 형편 덕에 먹고살 걱정도 없다. 아등바등하지 않고 무던하게 잘 사는 그가 부러웠다.
이런 복합적인 감정이 들 때면, 머무를 것인가 벗어날 것인가 갈림길에서 늘 되뇌는 말이 있다. '나는 선택할 수 있다'고. 몇 번이고 이 문장을 반복하다 보면 서서히 그 어두운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불쑥 두려워지거나 혼자 숨어버리고 싶을 때도 같은 시간을 가진다. 우선 밖으로 나가 가짜 미소라도 지어보기로 다짐하고 사람들 틈에서 괜찮은 척하다 보면 어느새 정말 괜찮아진다.
꿈을 좇는 삶은 사실 별로 재미없다. 음악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고된 시간이 걸리고, 어렵게 발표하고 나면 금세 져버린다. 새로운 음악을 내놓지 않으면 금방 잊히기 쉽고 곧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이어진다. 이런 차가운 현실을 버티게 해 준 힘은 마음속으로 했던 선택, 곧 결정의 감각이다.
어린 시절, 아이스크림 하나 먹는 일조차 부모님께 여쭤봐야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앨범을 기획하고 유능한 사람을 찾아 협업한다. 싱글을 몇 번 발표해 보니 미니 앨범을 낼 용기가 났고, 과거 대중 앞에 얼굴을 드러내기 꺼려했으나 이젠 뮤직비디오를 찍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선다. 피아노만 연주하던 나는 노래를 배우기 위해 런던에 단기 유학을 떠났고, 음악의 폭을 넓히기 위해 학교에서 기타를 빌려 독학했다. 작은 결정의 경험이 쌓여 마치 다마고치처럼 느리지만 조금씩 성장했다.
언젠가 샛노란 손잡이가 달린 버터 스프레더를 샀다. 버터를 자주 먹는 편이 아니고 주방에 대체할 만한 비슷한 도구는 얼마든지 있었으니 사치품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미리 실온에 두어 말랑해진 버터를 따뜻한 빵 위에 쓰윽 바를 때 알았다. 쓸 때마다 기분 좋아질 물건이라는 것을. 버터스프레더를 사기로 한 결정의 느낌과 버터를 바를 때의 희열은 지극히 사소한 사건이지만 기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게임을 하던 이웃은 이게 대체 다 무슨 말이야 했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멈췄던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