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 위에 얹은 생각

기적이 아니면 뭐겠어요의 뒤뜰에서

by 운조



‘기적이 아니면 뭐겠어요’ — 덧붙이는 한 편

“연재를 마무리했지만, 여전히 삶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묵을 쑤며 생각했습니다.”



아침 햇살이 부엌 창으로 스며드는 시간, 나는 점심 준비를 위해 도토리가루 봉지를 꺼냈다.

평소 같으면 간단히 밥상을 차리고 말았을 텐데, 오늘은 왠지 묵이 먹고 싶었다.

그래서 묵을 쑤기로 했다.

먼저 묵가루 한 컵에 물 한 컵을 넣고 고루 갠다.

덩어리 없이 잘 풀어낸 뒤, 다시 냄비에 물 다섯 컵을 넣고 갠 가루를 부어 불을 올린다.

그다음은 오롯이 손의 몫이다.

주걱을 잡고 끊임없이 저어야 한다.

팔이 아파도, 어깨가 뻐근해도 멈출 수 없다.

계속 젓고, 또 젓고, 끝까지 저어야만 묵은 차지고 쫀득한 힘을 얻는다.

묵은 참 까다로운 음식이다.

조금만 게으름을 부려도 바닥에 눌어붙고, 덩어리가 생겨버린다.

하지만 그 과정을 견디고 나면 맑은 갈빛 덩어리로 변해 식탁 위에 오른다.

나는 그 과정을 바라보며 문득 내 삶을 겹쳐본다.

고단한 날들을 쉼 없이 저어내고,

눈물 나게 힘든 시간을 버텨내야만

비로소 단단한 내일을 만들 수 있음을.

도토리묵은 사실 오래전부터 견디는 음식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전쟁 시기, 백성들은 산으로 숨어들어 도토리를 주워 왔다.

떫은맛을 빼기 위해 며칠이고 물에 담가내고, 그 가루로 묵을 쑤어 연명했다.

굶주림을 구제한 구황식품, 그것이 도토리묵이었다.

오늘의 평범한 점심 반찬 속에는 사실 전란과 기근을 견딘 민중의 숨결이 스며 있는 셈이다.

나는 문득 ‘묵(黙)’이라는 글자를 떠올린다.

침묵, 고요, 말없이 견딤.

도토리묵이 되기까지는 끊임없는 젓기와 불 앞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마치 인생의 고난을 묵묵히 견뎌내야만 비로소 빛을 얻는 것처럼.

‘묵’이라는 음식 이름 속에는 이미 인생의 비밀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묵은 담백하다. 그냥 먹으면 밍밍하다.

하지만 양념장이 더해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양념장을 만들기 위해 잠시 텃밭으로 나갔다.

햇살에 반짝이는 파 한 줌, 부추 한 줌을 뜯어 들고 돌아왔다.

갓 꺾은 풀잎의 향이 손끝에 배어들고,

그것을 잘게 썰어 간장에 넣으니

벌써부터 향긋한 내음이 부엌을 가득 메운다.

거기에 고춧가루와 참깨, 참기름 한 방울을 더하자

양념장은 살아 있는 계절의 얼굴이 되었다.

묵에 그 양념을 얹는 순간,

그저 담백했던 묵은 제 목소리를 찾았다.

밋밋했던 한 덩어리가

이제는 기억과 이야기를 품은 음식이 되었다.

내 삶도 그랬다.

짠 이별, 매운 고난, 달콤한 위로가

모두 양념이 되어 내 인생을 완성했다.

그런 양념이 없었다면,

내 삶은 그저 싱겁고 무채색인 묵 한 덩어리로 남았을 것이다.

어젯밤, 푸드트럭 불빛 아래에서 보았던 회복의 언어가 떠오른다.

레스토랑이 “회복하다”라는 뜻을 품고 있듯,

묵 또한 ‘묵묵히 견딤’이라는 언어적 얼굴을 갖고 있다.

회복은 반드시 화려한 장소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길모퉁이의 타코 한 접시에도,

부엌 한켠에서 저어낸 묵 한 덩어리에도

삶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숨어 있다.

이제 돌아보니, 내 밥상 위에는 언제나 파란만장이 있었다.

푸드트럭의 타코도, 드라마 〈폭군의 셰프〉 속 칼날과 불길이 오가는 주방도,

그리고 오늘 아침 내가 저어 만든 도토리묵도,

서로 다른 얼굴이지만 모두가 내 삶의 맛을 완성한 양념이었다.

도토리묵이 간장을 만나야 제 맛을 내듯,

인생도 양념이 더해져야 비로소 살아난다.

음식은 늘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살아라, 버텨라, 사랑하라.”

그리고 나는 덧붙이고 싶다.

묵묵히 먹이는 일, 그것은 곧

오늘을 지탱하고 내일을 부르는 작은 노래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오늘도 묵을 젓는다.

삶은 여전히 식탁 위에서 익어가고,

그 모든 과정이 어쩌면 기적이 아니면 뭐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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