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는 법
“가을의 나무는, 잃어버림 속에서도 다시 살아나는 법을 알고 있다.”
우리 동네 나무들이 노랗게 옷을 갈아입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름의 그림자를 붙잡고 있던 가지들이,
어느새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밤이면, 그 노란 잎들은 빛을 머금은 듯 반짝이고,
아침에는 햇살에 녹아들어 투명해진다.
오늘은 그 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었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고, 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찰칵, 셔터 소리 한 번에 가을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의 빛과 바람, 그리고 그 아래 서 있는 내가 한 장의 계절이 되었다.
바람이 불자 나뭇잎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잎 하나가 허공을 돌며 떨어질 때마다 작은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만큼 살았으니 괜찮다고.’
낙엽은 그렇게 자신을 놓는 법을 알고 있었다.
며칠 뒤면 나는 낙엽을 긁어모으기 시작할 것이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며 “이 많은 잎을 언제 다 치우나” 중얼거리겠지.
바람이 한번 불면 또다시 덮여버릴 걸 알면서도,
나는 매년 그 일을 반복한다.
낭만도 있지만, 솔직히 귀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일을 멈출 수 없다.
낙엽을 치우는 일은 마치 내 삶의 일부 같다.
이민 생활에서 하루하루 쌓여가는 일들을 치우고,
다시 쌓이고, 또 치우는 반복.
가게 앞 인도에 쌓이는 먼지,
손님이 두고 간 커피컵,
고장 난 재봉틀 옆의 실타래.
그 모든 것이 내 하루의 낙엽이다.
쓸고 또 쓸면서, 나는 어쩌면 내 마음의 구석들을 정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낙엽은 나를 닮았다.
바람 불면 쉽게 흔들리고,
때로는 바닥에 쓸려 다니지만,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을 품는다.
잎이 떨어지는 건 끝이 아니라 순환의 시작이다.
나는 그걸 이제서야 조금은 안다.
저녁이 되면 가로등 불빛 아래 나무가 다시 황금빛으로 타오른다.
어둠 속에서도 그 빛은 스스로의 온도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눈에는 스산하게 보일지 몰라도,
내게는 그 빛이 참 따뜻하다.
노란 잎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은, 오래된 위로 같다.
이민자로 살며 버텨온 시간들,
낯선 나라의 언어와 싸우며 익혀온 하루의 기술들.
그 모든 것들이 내 안에서 이제는 부드럽게 흔들린다.
나는 그 나무를 볼 때마다 ‘괜찮다’는 말을 듣는 것 같다.
가끔은 스스로에게 말해줘야 한다.
“오늘도 잘 버텼다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그 말 한마디가 나를 다시 세운다.
낙엽을 치우며 나는 문득 생각한다.
삶이란 어쩌면, 떨어진 잎을 한 줌씩 모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다시 가지에 매달 수는 없지만,
그 잎들이 있었기에 나무는 한 계절을 보낼 수 있었다.
우리의 시간도 그렇다.
버리고 흘려보낸 것들이 결국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나는 내일도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 것이다.
바람이 불면 노란 잎들이 또다시 내 어깨 위로 내려앉겠지.
그때 나는 잠시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볼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
햇살이 스며드는 틈,
그리고 그 아래 서 있는 나를 느끼며.
살다 보면 모든 것이 귀찮아지는 날이 있다.
그럴 땐 낙엽을 쓸 듯 마음을 쓸어내면 된다.
그 단순한 동작 속에 묘한 평화가 있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계절을 붙잡듯,
나는 오늘의 나를 붙잡는다.
나무는 다시 봄이 되면 파랗게 된다.
하지만 우리 인생을 생각하니,
모든 잎이 다시 돋아나는 건 아니라는 걸 안다.
시간이 지나면 새 가지가 나고 새 잎이 피지만,
그 자리에 있던 낡은 잎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가을마다 나는 내 안의 시간들을 한 장씩 떨어뜨리며 산다.
어떤 날은 잃은 것들이 서럽고,
어떤 날은 그것마저도 감사하다.
다시 푸르지 못한 가지에도 여전히 생명은 흐르고,
보이지 않는 뿌리 아래서 봄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생도 그럴 것이다.
다시 그때로는 돌아갈 수 없어도,
우리 안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무언가가 자라고 있을 것이다.
그 믿음 하나로 오늘을 견디는 일,
그게 어쩌면 우리에게 남겨진 작은 기적 아닐까.
오늘, 나는 그 기적 아래 서 있었다.
노란 나무 아래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새로 태어나는 계절의 숨결을 느끼며.
그 순간, 내 마음은 조용히 속삭였다.
“이 계절도, 이 하루도,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니면 뭐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