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내가 되어가는 시간
실화 에세이
>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 시편 40:2
그 말씀이,
내게 실제가 되어 돌아오던 순간이었다.
나는 눈을 떴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기억하던 것과 달랐다.
천장에서 쏟아지듯 내려오는 형광등 불빛,
사방은 적막했고,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왼팔은 힘없이 축 늘어졌고,
목을 살짝만 돌려도 예리한 통증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입을 열어 말해보려 했지만
쉰 숨결만 공기 사이로 갈라졌다.
얼마 전까지 산소 호스를 끼고 있던 목엔
붉게 눌린 자국이 따끔거렸고,
내 목소리는 마치 모래알을 씹는 듯 거칠게 갈라졌다.
나는 낯선 육체 안에 갇힌 사람처럼 느껴졌다.
손을 머리 위로 올려보았을 때,
짧게 밀린 두피 사이로 차가운 금속성 이물감이 느껴졌다.
두개골을 열고 다시 봉합한 자리엔
외과용 스테이플러가 지그재그로 박혀 있었고,
그 위엔 방수 테이프가 덧대어져 있었다.
그 아래 고인 땀은 아직 마르지 않은 생의 흔적처럼 뜨거웠다.
의식이 희미하게 돌아오던 그 시기,
병실에는 자꾸 타는 듯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간호사에게 "무언가 타고 있지 않나요?"라고 반복해서 물었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병실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사람들의 얼굴도 어딘가 낯설었다.
내게 말을 건넨 것 같았던 지인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지만,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 사람은 병실에 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기억은 분명했지만,
그 장면은 현실이 아니었다.
---
마스크 너머의 얼굴들
며칠 후, 나는 일반 병동으로 옮겨졌다.
하얀 보호복을 입은 간호사가 조용히 들어와
작은 플라스틱 그릇을 내밀었다.
그 안엔 따뜻한 국물이 담겨 있었다.
“아침 식사예요.”
나는 천천히 국물을 삼켰다.
따뜻한 액체가 식도를 따라 내려갔고,
그 길은 바늘로 찌르듯 따끔거렸다.
그 한 모금조차, 회복의 시작이었다.
창밖으로 가족이 찾아왔다.
면회는 여전히 금지였지만,
마스크 너머 눈빛과 손짓으로 우리는 마음을 주고받았다.
“엄마, 오늘도 힘내요.”
아들의 입모양이 창 너머로 또렷하게 따라졌다.
남편은 말없이 두 손을 모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 침묵은 말보다 더 단단한 위로가 되어
내 마음을 붙들어주었다.
---
재활은 전장 같았다
재활병동에 입원하던 날,
코로나19 재확산으로 면회는 전면 금지되었다.
세상은 병실 창밖 너머,
멀고도 아득한 풍경이 되었다.
어느 날 오후, 복도 끝에서 기침 소리가 터졌다.
“산소 마스크 준비하세요!”
“코로나 검사 바로 진행해요!”
의료진의 급한 발소리, 날카로운 명령,
비닐 장갑이 스치는 소리.
그 모든 것이 병실을
한순간 전쟁터로 바꿔놓았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소리로부터 도망치려 했다.
살았다고 안도했던 마음 위로
다시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오는 것 같았다.
그때, 멀리서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엄마, 힘내…”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쉰 숨결 속에서 스러지듯, 공기 속에 흩어졌다.
---
다시 시작은 손끝에서
며칠 뒤, 처음으로 재활치료실에 들어섰다.
내 앞에는 핀셋과 작은 구슬이 놓여 있었다.
손끝은 떨렸고,
구슬은 자꾸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괜찮아요. 다시 잡으면 돼요.”
치료사의 말이
기도처럼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
그 공간엔
다시 일어서려는 생명들이 있었다.
한쪽 팔이 없는 젊은 남성은
허리에 보행 벨트를 착용한 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고,
하네스에 매달린 중년 여인은
두 다리를 천천히 공중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곳은 몸뿐 아니라
마음이 다시 세워지는 조용한 훈련장이었다.
---
병동 끝 침대의 기억
병동 끝 침대엔 내 또래의 한국 여성이 있었다.
두 번째 뇌출혈을 겪은 그녀는
앉는 것조차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었다.
딸과 영상통화를 하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그녀.
“엄마, 울지 마. 우리 같이 이겨내요.”
딸의 목소리는 작지만 단단했다.
며칠 뒤, 그녀는 요양시설로 옮겨졌다.
그녀가 떠난 뒤,
나는 빈 침대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곳엔 아직도
그녀의 눈물과 체온이 남아 있는 듯했다.
다시 걷는다는 것
나도 작은 물건을 집는 연습부터 시작했다.
며칠 후, 허리에 보행 벨트를 착용한 채
계단을 한 칸, 또 한 칸 올랐다.
땀이 흘렀고 숨이 가빴지만
내 안에서 작지만 분명한 무언가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넘어지는 건 괜찮다는 걸.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기도했다.
John Donne의 시처럼.
“Break, blow, burn, and make me new.”
부수고, 불태우고, 다시 나를 빚어 주소서.
---
오늘 나는
하나님은 나를 무너뜨리셨지만,
결국 버리지 않으셨다.
나는 지금,
기가 막힌 수렁에서 끌어올려졌고
반석 위에 다시 서 있다.
오늘 나는,
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도
다시 걷는다.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신 그분의 손을 의지해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이 걸음이
누군가의 기도가 되기를.
기적이 아니면, 뭐겠어요.
---다음 화 예고 (3화: 집으로 돌아온 물결)
3화. 집으로 돌아온 물결 — 익숙한 집, 낯선 나
긴 병원 생활 끝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익숙했던 식탁, 창가, 가족의 얼굴.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손에 익었던 모든 것들이 낯설게 느껴졌고, 작은 일상마저 벅차게 다가왔다. 그 낯섦 속에서 나는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삶’은 회복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