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고 소중한 일상
회복의 언어 — 기적이 아니면 뭐겠어요
[1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2화] 다시 걷기, 무너지고 또 일어서다
[3화] 집으로 돌아온 물결
이번 화에서는, 다시 시작된 익숙하지만 낯선 일상 속에서
작은 동작들을 통해 ‘살아가는 법’을 새롭게 배워가는 여정을 전하고자 합니다.
물 한 컵을 따르는 손끝, 조심스레 강아지를 쓰다듬는 순간,
그 느리고 더딘 시간이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회복은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작고 조용한 일상을 견뎌내는 믿음이자 언어임을
하루하루 체득해가고 있습니다.
재활병동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낯익은 공간이었지만, 마치 미지의 땅을 탐험하듯
다시 하나하나를 익혀야 했다.
물 한 컵을 따르고, 숟가락을 드는 지극히 사소한 행동들,
심지어 사랑하는 강아지를 눈에 담는 것조차
새로운 훈련처럼 느껴졌다.
식탁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컵을 들어 올렸다.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기도하듯 되뇌었다.
‘흘리지 말자. 넘치지 말자.’
천천히 컵을 내려놓는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성공이다. 아주 작지만 분명한 승리였다.
거실로 나오자,
우리 집 골든 리트리버가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예전처럼 함께 뛰놀고 껴안는 일은
여전히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지만,
나는 천천히 몸을 숙여 녀석의 머리를 토닥였다.
조심스럽지만, 흔들림 없는 단단함으로.
강아지는 말없이 나를 올려다보며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괜찮아. 네가 예전 같지 않아도, 나는 널 변함없이 사랑해.’
그 깊은 눈빛 하나가,
내가 누구인지 잊지 말라는 듯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냄비 뚜껑을 열고 김이 피어오르는 걸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고,
천천히 국을 데우고, 손끝이 떨리며 옷을 개는 일까지,
모두 다 다시 배우는 성스러운 과정이었다.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었고,
삶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 사실이 한없이 부끄럽고, 서러웠으며,
때로는 억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작고 섬세한 동작 하나하나를 해내며
나는 깨달았다.
이 일상이야말로 무너졌다 다시 쌓아올리는
나만의 조용한 기도이자, 회복의 언어라는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들이 있다.
하루를 무사히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왼손으로 물건을 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사랑하는 이의 눈빛을 마주하고,
천천히 밥을 씹고, 따스하게 손을 흔드는 일들이
얼마나 찬란하고 소중한 일상이었는지를.
지금 나는,
마치 처음 태어난 아기처럼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말보다 느리고, 생각보다 더딘 걸음으로.
그러나 그 느린 배움 속에는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고요한 숨결이 깃들어 있다.
어느 날, 나는 직원에게 조용히 말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살려주셨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직원은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분명 이유를 알게 되실 거예요.”
그 말이 마음속 깊이 머물렀다.
곰곰이 생각했다.
과연 나를 다시 살리신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아주 오래전에도 죽음의 문턱을 넘었던 적이 있다.
급하게 수술을 받느라 학업을 중단해야 했고,
기나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 또 한 번 죽음의 강을 건너왔다.
그런데 이번 회복의 여정 중
가슴을 치는 듯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살아 있음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이유라는 것.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극적으로 구원하지 않아도,
그저 하루를 조용히 살아내는 것.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깊은 위로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물을 따르고,
국을 데우고, 강아지를 쓰다듬는다.
넘어지고 흔들려도, 다시 일어난다.
삶이 허락한 이 회복의 시간을
나는 묵묵히, 그러나 뜨겁게 살아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회복의 여정 중 갑작스럽게 ‘공부하고 싶다’는
간절한 갈망이 심장 속에서 샘솟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기대한 이도 없었지만
내 안에서 조용히 살아난 뜨거운 열망이었다.
그래서 다시 배움을 시작했다.
지금 나는 영어영문학과에 등록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고 확신에 찬 걸음으로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공부는 단지 지식을 쌓는 행위가 아니다.
그건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아직도 내 안에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을
세상에 조용히 증명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이제는 안다.
이 작고 단순한 일상들이야말로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진짜 삶의 언어라는 것을.
매일 다시 배우고, 다시 걷고,
물 한 컵을 조심스레 따르는 그 순간들이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다시 살아갈 용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살아내는 하루하루가
누군가에게 작은 기적처럼 닿기를.
기적이 아니면, 뭐겠어요.
이 느린 회복의 걸음,
이 작고 조용한 숨결 하나하나가
다시 살아가는 삶의 언어 아닐까.
다음 이야기 예고
5화. 작고 눈부신 것들을 다시 보다
— 살아 있음의 기쁨에서 나누는 삶으로
물컵 하나를 조심스럽게 드는 것부터 다시 시작한 나날들.
그 느리고 고요한 시간 속에서, 나는 마침내 ‘살아 있음의 기쁨’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조용한 기도, 그리고 손 내밈이 되어
조금씩 세상과 나누는 삶으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잊고 지냈던 작고 소중한 것들을 다시 바라보는 순간들을 통해
‘회복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