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설명하려니 말이 길어지는 순간
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다.
대학교 4학년 때 실내건축기사 자격증을 따면서 졸업도 하기 전에 선배를 통해 자연스럽게 디자인 전문회사에서 인턴을 시작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 시절 대한민국은 IMF를 맞았고 대기업 채용은 기회 조차 쉽지 않았다.
작은 회사지만 경력을 쌓아보자는 마음이 몇 년 간 이어졌다.
90년대 말 토요일에도 근무 하던 시절의 디자인 회사는 야근과 철야는 기본이였고, 정말이지 내 젊음이 고스란히 그 곳에 담겼었다. 심지어 대학원까지 다녔으니..
돌아보면,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이후에 더 큰 회사들로 이직을 할 수 있었고 경력과 내공이 단단해졌을 테다.
마침, 모 대기업에서 디자인 경력 채용이 났다는 소식을 주변 동료로부터 듣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마지막날 부랴부랴 원서를 넣었다.
작은 회사에서는 기획, 설계, 시공을 모두 경험 했고, 회사가 커질수록 내 역할은 ‘설계자’로 또렷해졌다.
설계부서에 있으면 정말이지, 밖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을 만큼 종일 책상에서 일하는데, 마침 시공 감리 차 외근 가는 길에 지원서를 접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금의 회사와 인연이 시작 되었다.
부동산 조직의 공간디자인 전문 경력직으로 입사를 했고,
이제 좀 편해질까? 기대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디자이너 출신들이 그렇듯, 나 또한 대기업 구조에 적응이 쉽지만은 않았다.
사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조직, 사람 관계는 어려울 때가 많지만 말이다..
2005년 당시, 대기업에서 디자이너로 일 한다는 것은 많은 도전의 연속이였다.
내부의 많은 부서와 경영진을 설득해야 하는 또 다른 내부의 ‘을’ 이였을 때가 많았고, 그렇게 1년이 다 되어 가던 때, 큰 스트레스로 몸에 이상이 왔다.
마침, 이전 직장의 선배님께서 본인이 있는 회사에 지원해보라는 권유에 평소에 관심있던 대기업 패션 부문이였기도 했고, 더 자유로운 분위기 일 것 같아서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하는 바람에 다시 이직할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결국 나는 더 자유로워 보이는 선택지 보다 장기적으로 좀더 안정적이고, 사내 디자이너가 거의 없었던 만큼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는 회사를 택했다.
완전히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입사 1년 만에 이직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그 선택이 당시의 나를 지탱해 주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또 적응이 되는 듯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움직였어야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작은 후회가 남아 있긴 하다.
물론, 그 때의 나는 나름의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다.
신사옥 프로젝트, 플래그십 스토어, 대형 전시 행사 등과 같은 빅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해내면서 인정을 받고 신뢰를 쌓아갔다. 디자인 실무 뿐 아니라, 전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조율하는 PM으로서의 역할이 고단했지만 꽤 괜찮았다.
그러다... 큰 회사라면 피해갈 수 없는 매년 있는 조직개편의 파도 속에 이리저리 휩쓸릴 때면, 본의 아니게 디자인 부서가 아닌 연관 부서로 배치를 받아 새로운 도전도 겪어야 했다.
그 중 경험했던 홀로그램, VR, AR 같은 실감미디어 콘텐츠 제작과 공간 사업은 시대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르면서 경력이 확장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업력도 넓어지고, 회사 안에서 역할과 책임이 계속 커져가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다시 디자인팀을 맡으며 브랜드와 디자인, 마케팅 전반을 아우르는 시기가 계속 이어졌다.
꽤나 괜찮은 디자인 전문가이자, 직장인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직책을 맡으면서부터는 내 손으로 직접 하던 일에서 실무 스킬적인 업무는 조금씩 멀어지는 관리자가 되어 가고 있는 내 모습에 막연한 불안이 자리 잡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큰 시련은 왜 한 번에 오는지..
다시 찾아 온 조직개편은 너무 가혹했고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채 낯선 부서로 이동을 하게 되었던 그 해, 그 전의 개편과는 타격감이 달랐다.
이제는 중년이라는 나이의 무게도 함께 현실감으로 다가왔다.
마흔이 넘어 부터는 ‘이대로는 아니야~’,
‘언젠가 회사를 나가면 할 수 있는 뭔가를 미리 준비해야 해!’ 라는 생각은 맴돌았지만
회사는 늘 바빴고 준비는 미루어졌고, 실행은 매번 2~3년 뒤라고 생각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변화 앞에서 나는 긍정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현장 발령도 아니고, 심지어 나만 그런 것도 아닌데..
대기업 이라는 큰 조직에서 한가지 일 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무가 확대되고 할 수 있는 역할이 늘었다는 의미로 보면 더 오래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잖아~'
그렇게 또 업무에 적응해 나갔고, 나름의 성과도 내며
나는 직장인으로서의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전문적인 나의 경력 관리 같은 건...,
많은 걸 내려놓아야 했다.
그 무렵
나는 나를 설명하기 더 어려워졌다.
가족들 모임에서 우연히 뵙게 된
예전에 우리회사를 다니셨다는 먼 친척 어르신이 물으셨다.
‘너 거기서 무슨 일을 하니?..’
한 번에 답이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설명하려니 말이 자꾸 길어졌다.
그 즈음이었다.
나는 답 대신?
자연스럽게 책을 더 자주 펼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