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은 쌓이는 것이 아니라, 번역되지 않으면 사라진다.

28년을 일 했는데, 다음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한동안,

익숙한 일상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유 없이 책이 있는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찾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마음이 답답해질 때면..


그저 그곳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고, 책장을 넘기고,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


돌아보면,

그 시간들은 나를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고,


그 변화는

내가 쌓아온 시간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28년 동안 일을 했다.

쉬지 않고 오래 일했다는 사실이, 언제부턴가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부족하지도, 크게 실패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다음이 잘 보이지 않는다.


회사 안에서는 늘 바쁘게 움직였고

밖에서 보면 안정적인 직장에서 꽤 괜찮은 경력을 쌓아온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앞으로 어떻게 가면 좋을까?"라는 질문이 생각보다 자주, 그리고 조용히 떠올랐다.


문제는 그만두느냐 마느냐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경력이

다음 단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나는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결과물보다 방향과 맥락을 다루는 기획 업무가 많아졌다.

디자인 회사에서, 그리고 대기업에서

디자인·기획·브랜드·마케팅을 오가며 일했다.


그래서 막연히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실행은 늘 미뤄졌고,

조직 안에서의 역할은 점점 넓어졌지만

정작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방법은 더 흐릿해졌다.


언제부터 다음이 보이지 않았을까.


대기업에 경력 입사를 했기 때문인지

회사에서 승부를 걸겠다는 마음은 아니었지만

일 중심으로 몸을 아끼지 않은 덕에 부장 승진까지는 이어졌다.


다만, 막연히 임원은 어렵겠다는 판단이 섰을 때

이런 질문이 따라왔다.

“그럼 회사를 그만두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하고 싶은 건 뭘까?”

“그건 돈이 될까?”


질문은 많아졌는데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24년 말

회사에서 희망퇴직 기회가 왔다.

적지 않은 퇴직금이 제안됐고

결정까지 주어진 시간은 2주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아직 그만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또렷하게 마주했다.


그리곤 한 가지 다짐을 했다.

당장 그만두지는 못하더라도,

준비된 사람이 되자.


2025년은 개인적으로 에너지가 많이 소진된 해였다.

계획은 있었지만 손에 잡히는 건 없었고,

그렇게 큰 각오도 없이

2026년을 맞이했다.


2026년의 첫 주말,

메모해두었던 생각들을 다시 들춰보다가

‘일단 써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이 글이 완전히 다른 무언가의 시작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다만,

질문을 기록으로 남겨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공개 글쓰기를 시작하기로 한다.


경력은 쌓이는 것이 아니라,

번역되지 않으면 사라진다.


새로운 일을 시작해 보려 하면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선택은 어렵고,

지금 당장은 다니는 회사가 있으니

시작은 자꾸 미뤄진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중요한 건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가 아니라,

그 시간을 지금의 언어로 다시 말할 수 있는가 인지도 모른다.


경력은 쌓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금의 언어로 번역될 때, 다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회사의 이름이 아니라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붙여

그동안 해온 일을 설명해 보면 어떨까.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내가 걸어온 방향이

이미 하나의 길이 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이 글은 퇴사를 권하기 위한 글도,

새로운 답을 당장 제시하기 위한 글도 아니다.


다만,

오래 일한 사람들,

또는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경력을 다시 읽을 수 있도록

언어로 정리해 보는 기록이고 싶다.


다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아직 끝이 아니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신호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부터,

그 번역을 시작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