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퇴직을 포기하던 해, 쇼펜하우어를 읽고 있었다.

나는 책을 통해 나를 읽기 시작했다

조직개편으로 낯선 부서에서 일하던 해,

자주 들르던 곳은 회사 근처 서점이었다. 회사 옆이 교보문고 였다.


점심시간, 퇴근 후 거의 매일 서점에 갔다.

마음 맞는 회사 동료와 또는 지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았지만,

말로 가볍게 휘발시키고 쉽지 않다는 마음도 작용했던 것 같다.


나는 오랜시간 디자인을 해온 사람이라, 책은 독서라기 보다 레퍼런스와 정보성으로 대하는 편이었다.

학창 시절엔 소설책도 꽤나 읽었던 것 같은데, 사회 생활을 하면서 부터는 그때 그때 필요한 책, 혹은 보기 좋은 책을 소장하는 쪽에 가까웠다.


책을 읽으며 마음을 정리하고, 책이 가득 있는 공간에서 호기심이 더 발동하고 에너지를 받는다고 느끼는 감각은 책 때문인지, 책이 있는 공간 분위기 때문이지 정확히 설명은 어렵지만.. 아마 그 때부터 또렷해진 것 같다.


그러던 중 2024년 11월, 희망퇴직 공지가 떳다.

하... 내년 2025년 5월이면 입사 20주년인데..

어렵게 버티어 온 회사인 만큼 20년은 채우고 싶었는데!

해야 해? 말아야 해?...


신청 대상은 나이 기준은 아니였지만, 적지 않은 희망퇴직금이 제안 되었고 결정까지 주어진 시간은 2주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아직 그만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또렷하게 마주했다.


당장 그만두지는 못하더라도, 준비된 사람이 되자.. 고 다짐을 했다.


어느새 나는 또 서점에 가 있었다.

희망퇴직을 고민하던 시간, 좀처럼 잡히지 않는 마음에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한 CEO의 자서전도

현실로 다가온 희망퇴직금 앞에 노후대비를 위한 재태크 책도 술술 읽혔다.


서점 중앙의 베스트셀러 평대 앞을 지나는데, 두 권의 책이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오십에 읽는 주역” 이였다.


사실, 나는 철학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렵고 지루하다기 보단, 너무 틀에 박힌 이야기 인 것 같고 예상되는 결말이지 않은가..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 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철학서적은 책표지가 예쁘지 않다.


그럼에도

이미 마흔의 끝을 잡고 있었던 탓인지, 손이 먼저 쇼펜하우어로 향했던 것 같다.

‘쇼펜하우어를 진작에 읽었다면?’ 라고 내심 생각하며, 책상을 넘겼다.


“마흔은 흔들리지만, 왕성한 활동들이 이어지는 시기

흔들린다는 건 실패가 아니라 정상적인 통과 지점”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었다.

가장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황금기" 이지만, "인생은 고통" 이라는 인식에 다다르는 때! 라고..


삶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고통 속에서 행복을 찾으며 주도적으로 살았던 쇼펜하우어를 만났다.


흔들렸지만, 직진할 수 밖에 없었던 내 모습이 보였다.


그러곤, “오십에 읽는 주역”을 펼치기 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나이, 오십의 지혜를 "주역"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였을 것이다.


다가온 변화 앞에 당장의 조급함보다 큰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결국 바람을 잘 타는 자라고..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운명을 탓하며 무기력증에 빠지는 것은 큰 오산이며 변화가 왔다는 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준비의 문제 라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으면서, 용감하게 퇴직이라는 변화를 선택하려 했던

내 자신의 조급함이 부끄러워졌다.


두 권의 책은

마흔의 흔들림을 너무 성급히 부정하지 말라고,

또한 오십의 변화 앞에서 의연하게 다음을 준비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였다는 살짝의 안도감과 함께

지난 시간이 무의미하게 사라지게 내버려두고 싶지않다면, 번역되어져야 하는 시기 임을… 상기하게 했다.


사실, 모르고 있지 않았을 테다.

마음을 붙들어 줄 무언가 필요 했던 것 같다.

나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고..


재미없는 철학서 라고 해서, 관심 밖의!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 은 아니였다.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숫자, 나이에서 오는 무게감을 오롯이 마주하게 되었고 그냥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때부터 였을까? 나는

책을 통해 나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다음편.

『 버티는 대신, 리프레시 휴가를 냈다. 』 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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