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다는 건, 결국 내 문장을 고르는 일

파리 서점에서 만난 한 문장이 내게 준 해방감

누구나 어디선가 읽은 듯한 한 문장의 글귀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거나, 그 문장이 어느 순간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던 경험이 한 번 즘은 있을 것 같다.

나 또한 여행에서 만난 한 권의 책이 나를 다시 읽게 했다.


오슬로 뭉크 미술관에서 집어든 책이 그랬듯, 북유럽 여행을 마무리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 중 경유한

프랑스 파리 OFR Bookshop에서 만난 책은 큰 울림을 주었다.


ofr. Paris는 디자인, 예술, 사진 관련 서적을 전문으로 하는 독립서점으로 기념품과 작은 갤러리도 운영하는 있는데, 프렌치 감성 가득한 북 큐레이션과 직접 만든 소책자들이 그전부터 궁금했던 터라 이번 경유 때 잠시라도 방문해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이며 햇살이 서점의 창을 반사했다. 서점 밖 가판대에 놓은 감각적인 잡지와 책들에 한참의 시간을 쓰고 난 뒤에야 서점 안으로 들어섰는데, 정말이지 이 파리의 작은 서점은 도시의 비밀의 방과 같이 소소하지만 취향이 묻어나는 것들로 가득했다.

IMG_5100.jpeg ofr.paris 서점 전경

ofr 자체 출판물들에 특히 눈길이 갔고, 데려오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았지만..

파리를 기념하자는 마음에 여행을 주제로 크기는 작으면서 화보가 멋스러운 책을 한 권 선택했다.


『Bon Voyage: A Nice trip to the French wine country』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 책을 읽으며 내 인생문장을 만나게 된다.


Bon Voyage』는 영국인 Fleur와 프랑스인 사진작가 Nadege라는 두 친구가 프랑스 시골길을 따라 내추럴 와인 농장을 누비며 발견한 단순하고 시적인 여정을 담은 ‘삶과 예술에 관한 감성 로드무비’ 같은 에세이다.

대규모 생산 방식이 아닌 자연과 전통에 헌신하며 ‘평화로운 저항’을 이어가는 작고 소중한 장인들의 삶을 조명하며 여행 중 만난 사람들과의 태도, 아이들과의 대화, 그리고 자연이 주는 영감을 시적인 산문과 사진으로 엮어냈다.


처음엔 프랑스 시골 마을의 서정적인 화보가 가득한 여행 에세이 정도로 생각했지만, 끝까지 읽고서야 여행기 이상의 깊은 통찰과 그 순간들을 깊이 있는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시 파리의 ofr서점이 추구하는 특유의 예술적 감수성과 ‘느린 삶(Slow Life)’의 미학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IMG_5097.jpeg ofr.paris 서점에서 발견한 책 《Bon Voyage》

책의 후반부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작가는 여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말한다.

"You don't need a PhD to appreciate an epic sunset."

(장엄한 일몰을 감상하기 위해 박사 학위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I like to think that what makes our worth is how we make others feel."

(우리의 가치를 만드는 것은 우리가 타인을 어떻게 느끼게 하는가에 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순간, 단어 하나의 놀라운 우연에 깜짝 놀랐다.


회사 옆 교보문고를 오가며 고민하던 시절, ‘내 경력은 어디로 가야 할까?’ 박사수료 후 박사 학위논문이 계속 미루어지고 있었던 터라,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갇혀 있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박사학위’를 언급하며 삶의 본질을 꿰뚫는 책을 선택해 온

이런 아이러니한 순간이라니!

파리의 한 서점에서 무심코 집어 든 책 속에서 "박사 학위는 필요 없다"는 문장을 마주하며 해방감이 밀려왔다.


내가 박사 논문을 완성하느냐 마느냐 라는 '자격'의 문제로 고민할 때, 이 책은 "디자인으로, 혹은 이제 새롭게 시작할 무언가로 타인에게 어떤 감동을 주느냐가 당신의 진짜 가치"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쌓아온 업력의 탄탄한 토양 위에, '박사'라는 타이틀이 없어도 충분히 아름다운 일몰(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문장이 아니었을지..


'공간'을 만들던 손이 이제는 '글'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그건 학위 논문보다 더 생생하고 가치 있는 나만의 '인생 논문'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IMG_5115.jpeg 책《Bon Voyage》의 눈길을 끄는 문장과 서정적인 화보

그리고 책의 맨 마지막에서 “여행은 늘 겸손함을 가르쳐준다”라고 말하는 작가의 이 문장은

나의 여행 가방 속에 담긴 가장 소중한 한 문장이 될 것 같았다.


“You have no other choice than to be you”

(생략: 여행 중에는 아무도 당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은 오직)

당신 자신이 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행지에서 더 솔직해지는 걸까?

그 순간 집어 든 한 권의 책은 누구의 시선도 상관없이 오롯이 내 눈에, 내 손이 가는 대로 펼쳐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문장은 여행의 끝에서 다시 나를 바라보게 하는 위로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마음이 지칠 때 다시 펼쳐보면 또 다른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에서 만난 보석 같은 두 권의 책을 비교해 보고 싶어졌다.

뭉크 뮤지엄에서 만난 책은 북유럽의 깊은 사색이 담긴 다소 묵직한 에세이 라면

파리 ofr서점의 책은 자유로운 감성의 여행기록으로 서로 다른 색깔인 것 같지만,

두 책 모두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겉모습 너머의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단단하고 아름다운 시선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뭉크 뮤지엄 ‘알리 스미스’의 《So in the Spruce Forest》

고민하던 '지난 경력과 내 삶의 연속성'에 대해 아름다운 메시지를 전해준다.

<보이지 않는 것의 실재> 작가는 뭉크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공기(Air)"를 그렸다고 말한다.

나의 지난 경력도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내 시선과 감각이라는 '공기'가 되어 앞으로의 삶에 밑바탕이 되어줄 거라 말하는 것 같다.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력> "예술은 죽음을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음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메시지는 직장인으로서의 '사회적 마감'이 끝이 아니라,

자연인 나의 '살아있는 감각'을 깨우는 새로운 시작임을 응원하는 건 아닐까 기대하게 한다.

뭉크-4.jpeg 뭉크 뮤지엄 ‘알리 스미스’의 《So in the Spruce Forest》


파리 Ofr. 서점에서 만난 ‘나데주 응우옌’의 《Bon Voyage》 는

'공간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따뜻한 인사이트를 건네주었다.

<나 다움의 발견> 베트남계 프랑스인 작가가 겪은 정체성의 고민은 희망퇴직을 고민하며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던 시기와 닮아 있었다. 작가는 결국

"당신 자신이 되는 것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다"라고 결론짓는데, 이는 내가 어떤 일을 하든 결국 '나 다운 디자인' 혹은 '나 다운 글'로 귀결될 것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단순하고 시적인 삶> 화려한 성공보다 "장엄한 일몰을 보는 데 박사 학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작가의 말처럼, 인생 2막은 조금 더 느리고, 단순하며, 본질적인 기쁨(책, 공간, 사람)에 집중하는 시간이 되어도 괜찮다고 응원해 주는 것 같다.

무작정 버티기보다 조금은 내려놓기 위한, 쉼을 위해 떠난 여행에서 만난

북유럽 숲 속의 뭉크는 '보이지 않는 생명력'을 보라 했고,

파리 시골길의 와인 메이커는 '나 자신이 되는 용기'를 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인생의 다음 챕터는 그렇게 이미 내 손 안의 책들 속에 적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 문장을 고른 것 같기도 하다.

여행길 위에서 만나는 책은 나를 더 풍요롭게 한다.

북유럽의 숲과 프랑스의 포도밭을 종횡무진한 것 같은 나의 여행이 이 책들과 함께 더 오래도록 반짝일 것 같다.



에필로그

북유럽여행을 마무리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파리를 경유하기로 한 선택은

북유럽과 프랑스 파리의 동시대적 빈티지 디자인을 비교해 보고 싶었던 욕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책’과 ‘책이 있는 공간’에 매료되는 반전이 있을 줄이야!


오랜 시간 공간디자인을 해오며 책과 그 책이 놓인 공간에 매료된 것은

지난 경력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읽어내는 나만의 관점과 취향이 더해져

새로운 형태인 ‘기록(에세이)’으로 이어지는 멋진 징검다리가 되어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자신은 없지만.. 앞으로 써 내려갈 글과 공간, 그리고 그 속의 사람들 이야기까지

나도 기대해 보고 싶어진다.


마지막으로 책

《Bon Voyage》에서 “진실한 삶의 조각들을 나눠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는 문장에서 처럼

나 또한 여행 중 만났던, 진심을 다해 현지의 경험담을 나눠주었던 코펜하겐의 한인 청년 사업가와 헬싱키 디자인 유학생에서 이젠 유치원 선생님이 된 그들의 삶에 대한 진정성에 경외심을 느끼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다음 편.

‘책이 있는 공간’ 이야기를 이어가 보려 합니다.

IMG_5105.jpeg ofr.paris 서점 전경
IMG_5109.jpeg
IMG_5111.jpeg
IMG_5112.jpeg 책《Bon Voyage》의 서정적인 와인 농장 화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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