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다이아몬드, 과거의 기록이 오늘의 휴식이 되는 곳
블랙 다이아몬드(‘덴마크 왕립도서관’의 애칭)의
검은 화강암 벽면은 주변 풍경과 운하, 그리고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을 거울처럼 비춘다.
지금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생생한 풍경들
10월의 낮은 햇살이 운하에 부딪혀 도서관 실내로 산란되는 그 찰나의 순간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이었다.
검은 화강암 사이로 난 거대한 유리 틈새, 그 안에서 에스컬레이터는 마치 운하의 물결을 따라 흐르듯 부드럽게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밖으로는 반짝이는 운하의 윤슬이, 안으로는 지식을 향해 오르내리는 이들의 생동감이 교차하는 곳. 나는 그곳에서 덴마크 왕립도서관이 단순한 서고가 아니라, 도시의 호흡을 담아내는 거대한 심장임을 직감했다.
북유럽여행에서 첫 번째로 닿은 도시는 현지인으로 살아보기! 그런 로망이었던 코펜하겐이었다.
코펜하겐은 공항에 내리면서부터 느껴졌다.
디자인 수도라는 말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도시의 디자인은 눈에 띄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이끌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운이 좋게도 덴마크 왕립도서관에서 만난 한인 청년 사업가에게 들었던 덴마크가 디자인 강국이 된 이유는
단지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
‘디자인은 사람들의 행동방식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디자인을 물건에만 머무르게 하지않고 도시재생디자인, 공공디자인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한다’ 고 했다.
평소 디자인에 대한 내 가치관과 너무 닮아 있기도 했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디자이너가 아닌 사업가를 통해서 이런 얘기를 전해 듣게되니 움찟 놀라우면서도 부럽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이후 코펜하겐의 일상을 보내며 곳곳에서 이러한 사상이 사회적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아직 갈 길이 먼 우리나라의 현실이 떠올라 씁쓸해지기도 했다.
이는 디자인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고, 그러기 위해 나 또한 오랜 시간 디자인을 업으로 삼아왔는데, 어느새 흐릿해져 가던 내 감각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여하튼, 이미 구글맵에 표시된 '위시 스폿'들이 가득했지만, 왜 때문인지 이곳 ‘덴마크 왕립도서관’은 사전
정보가 없었다. 각 나라별 대표 박물관, 도서관들은 대략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북유럽은 가구디자인이 워낙 유명해서인지, 해외 건축 거장의 작품이 아니어서였는지, 현지 도착하고서야 코펜하겐 카드로 방문할 수 있는 가장 추천하는 장소 중 한 곳이라 해서 방문하게 되었다.
하, 그런데 코펜하겐에 2주 넘게 머무는 동안 4번이나 가게 될 줄이야!
로비에 들어서자 카페와 서점이 있고, 이어서 안으로 들어서면 대형 아트리움 안으로 콘서트홀과 전시장도 함께 배치된 것은 '우연한 만남'을 유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책을 보러 온 사람이 우연히 전시를 보고, 산책하던 사람이 들어와 음악을 듣게 만드는, 즉 문화적 허브가 되는 것이 건축가의 핵심 의도라고.
거대한 아트리움 창밖의 운하를 바라보고 있으면
누구든 이곳이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책은 여전히 중심에 있지만,
이 공간에서는 책이 또 다른 경험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1999년 완공된 신관을 설계한 덴마크의 유명 건축 그룹 ‘슈미트 함머 라센(Schmidt Hammer Lassen)’의 콘셉트는 명확했다고 한다.
"지식은 닫혀 있지 않고, 도시와 운하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건물 중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유리 절개면(Atrium)은 밖에서는 운하의 빛을 안으로 끌어들이고, 안에서는 도시의 움직임을 내다보게 한다. 도서관이 고립된 섬이 아니라 도시의 일부임을 강조한 설계인 것이다.
묵직하고 폐쇄적인 검은 화강암 외관과 달리, 내부는 빛이 쏟아지는 개방적인 구조인 이유가 바로 이 "반전의 환대" 였던 것이다.
덴마크 왕립도서관은 세 개의 시대를 관통하는 거대한 지식의 통로다.
가장 안쪽에 자리한 1648년 프레데리크 3세가 세운 국립기록원의 묵직한 서고에서 시작된 지식의 역사는,
한때 공중 벨트(Book Conveyor)를 타고 정원 위를 가로질러 1906년 지어진 지금의 구관으로 쉼 없이 흘러들었다.
덴마크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자 그룬트비(N.F.S. Grundtvig)의 교육 철학이 깃든 붉은 벽돌의 성전에서 단순히 가두는 기록의 창고가 아닌, 시민들 간의 대화와 지성으로 숙성된 그 기록들은
이제 1999년 완공된 블랙 다이아몬드의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운하 너머 세상으로 눈부시게 산란된다.
과거 고요한 침묵의 서고에서 시작한 기록이 근대의 사유로 이어졌고, 이제는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도시의 거실’로 현대의 교류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 공간이 된 것이다.
지식이란 고립된 유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고 소통해야 하는 생명체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공중 벨트가 사라진 그 빈 공중을 바라보며 나는 오히려 지식의 더 자유로운 흐름을 느꼈다.
그날의 공기, 운하의 물결, 그리고 덴마크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보여준 여유로운 모습들이 이 역사적·건축적 맥락과 만나 이방인인 내게도 가장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이 되어버렸다.
도서관과 전시관까지 돌아보고 내려와
1층 카페 '외이엔(Øieblikket)'에서 플랫화이트 한잔과 대니시 페스트리를 주문했다.
플랫화이트의 온기와 갓 구운 빵의 고소함, 그리고 반짝이던 운하 앞 테이블에서 코펜하겐 감성 충만한 스타일리시한 현지인들과 나란히 앉아 즐기던 그 '순간(Øieblikket)'이야말로 내가 코펜하겐에서 찾은 가장 덴마크다운 풍경이었다.
심지어 운하 맞은편에 위치한 세계적인 설치 미술가이자 건축가인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런던 테이트 모던의 거대한 인공 태양 설치로 유명한 분이죠!)’이 설계한
‘서클 브리지(Cirkelbroen, The Circle Bridge)'는 꼭 찾아가서 걸어봐야지 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인데, 블랙 다이아몬드와 나란히 마주하고 있었다니! 감동은 배가 되었다.
범선(돛단배) 5척이 맞물려 있는 형상의 이 브리지는 원형 플랫폼들이 지그재그로 배치되어 있어 사람들이 속도를 늦추고 잠시 멈춰 서서 서로를 마주하거나 풍경을 즐기도록 유도하는 '머무름의 미학'을 담고 있다.
왕립도서관의 '교류'와 ‘사유’의 철학과도 맞닿은 현대적 재현인 듯했다.
그곳과의 첫 만남은 화창한 가을 햇살이 운하에 부딪혀 산란하는 윤슬로 가득했다면,
코펜하겐을 떠나던 마지막 날 다시 들렀을 때는 비바람에 잿빛이 되어버린 변덕스러운 하늘과 운하가 도서관의 아트리움을 점령하기도 했지만 머물렀던 모든 순간이 좋았다.
도서관이라는 공기가 참 좋았다.
에필로그
수백 년 전의 기록이 오늘의 내게 휴식이 되었듯,
오늘 내가 정성껏 써 내려간 이 기록 또한
누군가의 내일에 다정한 휴식이 되어 주었으면
나는 읽고, 쓰고, 나누며 나라는 사람의 지도를 그려 본다.
"인생은 오직 거꾸로 되돌아보아야 이해되지만, 앞을 향해 살아가야만 한다."
덴마크가 낳은 위대한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가 남긴 문장으로 그의 방대한 친필 원고와 일기들이 바로 이 왕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내가 쓰기 시작한 이 에세이 역시 작년 10월을 '거꾸로 되돌아보며' 오늘의 나를 이해하고, '내일의 휴식'을 준비하는 과정이니 키르케고르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도서관 카페에 앉아 운하를 바라보며 느꼈던 그 여유와 기록들이 결국 나를 정의하는 소중한 자산이 된 것 같다. 덴마크 왕립도서관이라는 공간 자체가 수백 년 전의 기록을 품어 현대인에게 휴식을 선사하듯, 내가 써 내려가는 이 에세이도 훗날 나 자신은 물론 누군가에게 이 글이 닿는다면 짧지만 따듯한 쉼.. 또는 코펜하겐으로의 잠깐의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카페 '외이엔'(Øieblikket= The Moment)'의 이름처럼, 그곳에서의 시간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울림은 오래 함께 할 것 같다. 키르케고르가 인생은 거꾸로 보아야 이해된다고 했듯, 나는 도서관의 묵직한 기록들 사이에서 나의 지난가을을 복기하며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마치, 그룬트비가 꿈꿨던 '지식의 상호작용'과 슈미트 함머 라센이 의도한 '교류하는 도서관'의 정신과
나 또한 그 어느 한 지점에서 교집합으로 만나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거대한 블랙 다이아몬드가 비춘 건 그저 지나가던 관광객의 내 모습이 아니라
‘나 자신’ 이였다.
다음 편.
‘책을 읽는다는 건, 결국 내 문장을 고르는 일’ 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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