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장소, 책이 있는 공간의 힘
학상시절 나는 그다지 공부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상위권을 유지하긴 했지만 평생 살면서 책벌레, 독서왕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물론 공부를 잘하는 것과 책을 좋아하는 것은 조금 다른 영역의 것이긴 하지만..
무튼 그런 내가 요즘, 책-책이 있는 공간에 관심이 커져 가는 건 참 재밌다.
오히려 뭘 좋아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커피를 아주 좋아한다.
커피가 먼저였는지 커피가 있는 공간이 먼저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난 카페 공간을 참 좋아한다.
심지어 작년엔 복잡한 머리를 식힐 겸 주말시간을 아껴 바리스타 자격증도 땄다.
디자인회사 밤샘하던 20대 시절 맥심커피로 아침을 시작할 때, 각성이 되기도 했지만 그 커피 향이 좋았고
해외여행에서 스타벅스를 처음 접하면서.. 그리고 청담동 카페 74, 압구정동 느리게 걷기 등의 디자인 카페가 들어서면서 공간 디자인을 하는 내겐 영감의 원천이 되어 새로 생기는 카페라면 어디라도 달려가곤 했다.
그러다 라테아트가 예쁘게 그려진 카페라테, 정성스레 내리는 핸드드립 커피까지 다양한 글로벌 커피문화가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 이제는 우리 일상 한 중간에 없어서는 안 될 공간이 된 것 같다.
마치 카페의 변천사를 상기시키긴 했지만
생각을 정리해 보면..
요즘의 카페라는 공간은 언제든 편히 찾아가서 쉴 수 있고,
누구는 조용히 책을 읽고 노트북 작업을 하고 때론 전시회도 열리는 그런 문화공간이 되었다는 것이고
최근 우리나라에 독립서점이 늘어나는 현상을 보면,
책이 있는 공간도 커피 공간과 교집합이 많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마치 평행이론 인지..
나는 책을 좋아하는 것인지? 책 공간을 좋아하는 것인지! 라는 생각에 닿는다.
한 사람의 독자이면서 또 한편으론 공간 디자인을 오래 한 사람답게 책이 있는 공간을 접하면 기획 의도부터 동선, 재료의 디테일은 기본이고 그 속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탐색하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뀌는데,
책이 있는 공간은 그런 면에서 참 흥미로운 장소이지 않을까..
그래서일까?
서점에만 가면 나는 늘 예상했던 시각을 훨씬 넘기고서야 자리를 뜨곤 한다.
최근 몇 해 심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으며
책을 매개로 책이 있는 공간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 좋아하는 공간들 중 하나를 넘어 더 깊은 관심이 생겼고,
유럽여행에서 만난 보석 같은 도서관들과 서점들이 내게 주었던 편안함과 즐거움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여행에서 돌아와 세계의 또 다른 서점들에 관련한 책들을 찾아보려고
다시 찾은 교보문고에서 익숙한 제목의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레이 올든버그(Ray Oldenburg) 교수가 쓴 ‘제3의 장소(The Great Good Place)’
도시인들에게 영감을 주기고 하지만, 사회문화-도시-건축-공간디자인 분야에서 활발하게 인용되고 연구되는 문헌이기도 해서, 대학원 시절 공간 디자인 분야 추천 도서였지만 내 연구주제와는 거리가 있었기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책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직관적으로 제3의 장소라는 것이 요즘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의 실마리가 되어 줄 것 같은 반가운 마음에 책을 넘겨보게 되었다.
이 책을 제대로 읽고서야
내가 왜 그 시절 서점에 그렇게 열심히 갔었는지,
유럽여행 중 그 도시들의 도서관과 서점에서 이방인였지만 환대의 느낌을 받았는지 명확해졌다.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는 저서 『제3의 장소』에서 작은 카페, 서점, 등 동네 술집까지
가정(제1의 장소)과 일터(제2의 장소) 사이의 완충지대이자,
우리 삶을 지탱하는 비공식적인 공공장소를 “제3의 장소”라 명명한다.
그가 꼽은 이 공간의 핵심은
“서로의 사회적 지위를 묻지 않는 평등함과 대화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유희적 분위기”에 있다.
화려한 간판 대신 낮은 프로필을 지향하며 집과 같은 안락함을 주는 이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목적 지향적인 삶의 긴장을 내려놓는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접근성과 단골들의 느슨한 환대가 흐르는
이 ‘비블리오(책)-서드플레이스(Biblio-Third Place)’는
고립된 현대인들이 타인의 존재를 배경 삼아 안전하게 숨을 고를 수 있는 현대판 아고라가 되어준다. 고..
서점이 단순한 도서 구매처를 넘어
‘비블리오-서드플레이스’로 기능할 때
이용자의 장소 애착과 심리적 안녕감이 높아진다는
저자의 통찰력에 내가 그 공간에서 왜 그렇게 오래,
그리고 자주 머물고 싶었는지
생각과 느낌이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혼자 있고 싶지만, 혼자이고 싶지 않을 때
우리는 서점에 간다.
‘서로 이름은 몰라도 인사를 나눌 수 있는 느슨한 유대감’
현대사회에 얼마나 귀한 가치인지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리는 때론 혼자이고 싶지만, 동시에 혼자이고 싶지 않다.
서점과 카페 모두 그 모순된 마음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고독의 공유지’인 것이다.
타인과 눈을 맞추지 않아도, 같은 문장 위에 머물고 있다는 감각만으로 우리는 연결될 수 있으니 말이다.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안전하게 고립되며, 동시에 다정하게 연결되는..
이에 덧붙여 제3의 장소 중 '책이 있는 공간'에
내가 유독 관심이 가는 건
누군가에겐 지식의 바다에서 결실이 되기도 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상의 알고리즘에 의한 지식 편향이 아닌,
내가 그랬듯
열린 공간에서 생각지 않았던 책을 만나고 타인의 세상이 열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기회가 오프라인 책 공간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알고리즘이 아닌, 우연으로 만나는 공간
이 책은 1980년대 이론이기에 2026년 현재에 적용하기 위해선 확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AI시대로 접어든 지금,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편향적 지식과 난독증 등 을 위한
대안 공간으로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거창해지고 싶지는 않다.
낯선 여행지에서 받았던 그 환대의 의미를 찾아보고 싶어 졌고
다만, 왜 지금 시대에 '책이 있는 공간'에 주목해야 하는지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역할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현대인들은 완전한 소통은 부담스럽고, 완전한 고립은 외롭다.
낯선 사람과 갑자기 인사하기는 어렵지만,
같은 책을 보고 있거나 서점 주인의 큐레이션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대화하고 있는 샘이다.
올든버그가 말한 ‘대화 중심’의 가치가 책을 통해 가장 우아하게 구현되는 셈이다.
‘함께 하는 고독’을 즐기는, 이런 것이 바로 제3의 장소의 ‘느슨한 유대감’의 정체성 일 텐데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공간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 유럽여행은 오랜 시간 머물지는 못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공간의 공기와 책을 넘기는 사람들과의 정서적 교류..
그런 유대감으로 각각의 도시에 애착마저 생겨난 것 같다.
그래서 책이 있는 공간의 경험은 그 도시를 다시 보게 만드나 보다.
왜 우리는
AI가 추천하는 알고리즘 세상보다
책장이 있는 공간에서
더 넓은 세상을 만나게 될까?
결국,
책이 있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문장을 고르고
누군가에게는 고립을 깨는 다정한 인사가 되고
누군가에겐 지식의 결실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그 지역의 문화가 되는
그래서 북유럽에서는 도서관을 '도시의 거실'이라고 부르나 보다.
갑자기, 정의 내리고 싶어졌다.
북유럽의 도서관 vs 파리의 서점
도서관과 서점은 뭐가 달라?
이렇게 책이라는 배를 타고.. 생각은 점점 더 큰 바다로 흘러간다.
다음 편에서는
내가 만난 '북유럽 도서관과 파리 서점'을 통해 그 차이를 들여다보려 합니다.
에필로그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모르겠다"
나 또한 그 답을 찾기 위해 필명을 '경력을 번역 사람'으로 정해 버렸다.
다음 스텝으로 가기 위해 나를 찾는 과정의 노력으로 시작한 것이 글쓰기 이기도 하다.
최근 본 유튜브 재테크 영상에서 본업의 중요성을 얘기하며, 다른 무언가 준비하고 싶다면
"나 자신에게 집중해 보는 시간을 꼭 가져라!"라고 말하는 ‘커리어 엑셀러레이터’의 조언을 들으며
지금 내가 보내는 시간이 여엉 엉뚱한 짓은 아니네~ 라며 괜히 뿌듯해졌다.
비록, 삐거덕 하는 위기를 맞고서야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왔지만
때론, 생각과 글이 옆 길로 빠지고 시간과 건강이 따라주지 않아 더디어지기도 하지만
괜찮아~ 조금 늦어져도..
시작은 되었고, 한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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