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여행한다는 건, 나를 환대하는 장소를 찾는 과정

헬싱키 도서관 ‘Oodi’와 파리의 서점 ‘Ofr’ 사이

북유럽여행은 코펜하겐에 머물며 인근 나라들을 오가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말뫼 시립 도서관은

한 장의 사진 때문에 찾아간 곳이었다.

알고리즘에 의해 보인 사진 한 장은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나무 풍경과 도서관 서가들이 하나인 듯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그 고요하고 평화로운 장면에 반해서 직접 가보고 싶었다.

코펜하겐에서 바다를 건너는 기차로 1시간이면 닿는 곳이기에 고민의 이유가 없었다.


말뫼 중앙역에서 내려 도서관으로 향하는 30분 정도.. 길에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도서관 전체를 품어주는 통창 너머 풍경도 너무 아름다웠지만,

그 안의 사람들 모습으로 시선이 자연스레 옮겨갔다.


신문을 읽는 노인, 책을 읽는 중장년층, 토론을 하는 대학생들, 재밌는 의자에 앉아 장난을 치는 어린아이들과 심지어 책을 사이에 두고 데이트를 즐기는 청소년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머물고 있었다.

여기는 ‘놀아도 도서관에서 노는구나!’

그 순간

도서관은 더 이상 조용히 책을 읽는 공간이 아니라

저마다의 서사가 담긴 일상의 장면이 되고, 한 장 사진 너머에 있는 공간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자연을 배경 삼아 다양한 형태의 독서 공간이 제공되는 말뫼 시립 도서관

그리고 그 감각은,

헬싱키 Oodi에서 더 확장되었고,

파리의 서점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졌다.


헬싱키에서 Oodi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다.

건축가 ‘알바알토’, 디자인가구 ‘아르텍’, 현대미술관 ’ 아모렉스’ 그리고 사랑스러운? ‘무민’ 정도가

내가 기대했던 핀란드의 주요 일정였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가 끼어들었다.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헬싱키 거주 한인을 만날 수 있었고, 그녀가 추천하는 1순위 헬싱키 스폿이 헬싱키 중앙 도서관 “Oodi 오디”였다.


오디를 처음 만나던 그날 또한 이어지는 차가운 공기와 비바람에 북유럽의 10월은 이렇구나.. 적응할 법도 했지만, 헬싱키의 파란 하늘도 보고 싶은데 하는 원망 썩인 마음으로 오들오들 떨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래도 도서관 앞 광장에서 만난 핑크빛 대형 네온 사이니지 “Helsinki "가

‘ I Love Helsinki’라고 말하는 듯 위트 있게 온기를 나눠어 주었다.

핑크빛 네온 사이니지 “Helsinki "

분명 도서관이라고 들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건 적막이 아닌 사람들의 낮은 웅성거림과 체스판 위 기물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1층 출입구에 들어서며 제일 먼저 내 시선을 끈 것은 로비 창가 쪽으로 펼쳐진

체스 테이블들 이였다.

도서관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 책이 아니라, 체스판 이라니!

통창 넘어 국회의사당과 많은 빌딩들이 내다보이는 풍경을 배경으로 노인과 청년,

아이와 아빠가 함께 체스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신선한 문화 충격으로 다가왔다.

체스 한 판의 여유가 흐르는 도시의 에너지가 모이는 곳이었다.


정숙을 강요하지 않는 도서관, 누구에게나 거실을 내어주는 도시

헬싱키 중앙도서관 오디는 그렇게 나의 고정관념을 기분 좋게 무너뜨리며 시작되었다.

오디 1층 로비의 체스판

핀란드 독립 100주년 기념으로 2018년 오픈한 오디는

'도서관'이라는 명칭을 쓰지만, 실질적으로는 시민들을 위한 거대한 실내 광장이자 문화 허브이다.


경계를 허무는 건축 구조

오디의 건축은 단순히 '멋'을 부린 게 아니라,

기능의 수직적 분리를 통해 3개의 층으로 명확히 구분하고 사용자 경험을 설계했다고 한다.

1층 로비(Active Hall & Chess)는 누구에게나 열린 문턱 없는 광장으로 카페, 영화관, 전시장 등 거리의 연장선상에 있어서 누구나 쉽게 들어올 수 있다.

2층 어반 워크숍(Creative Space)은 도서관에서 재봉틀 소리가?!

3D 프린터, 재봉틀, 녹음실, 게임룸까지 이곳은 지식의 저장소가 아닌, 창조의 공간으로 정적인 도서관의 편견을 깬다.

3층 북 헤븐(Book Heaven)은 책으로 만든 천국이라고 해야 하나?

구름 같은 천장 아래서 빛을 받으며 다양한 형태로 책을 읽는 공간이다.

아름다운 건축미와 그 속의 평온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 속의 나도 일원이 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또한 건축 파사드는 핀란드산 가문비나무를 사용해 거대한 배의 선체 같은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내는데, 차가운 유리 건물이 가득한 도심 속에서 시민들에게 심리적 온기를 제공하는 건축 의도가 담겨 있다.


민주주의와 포용의 미학

오디의 디자인은 '사용자 중심'이라는 북유럽 디자인 철학을 그대로 보여준다.

서가들 사이의 고급 가구들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아르텍(Artek) 등 핀란드를 대표하는 디자인 가구들을 배치해, 시민들이 최고급 디자인을 일상적으로 누리게 함으로써 '모든 시민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고 한다.


나 또한 비어 있는 아르텍 의자를 하나 골라 한참을 앉아 있었다.


북 헤븐(Book Heaven)의 완만한 경사면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걸터앉거나 누워서 책을 읽고, 창밖으로 흐릿한 단풍과 가을비가 내리는 풍경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따뜻한 가문비나무의 질감과 부드러운 조명 아래서 문득 생각이 스쳤다.

북유럽의 ‘휘게(Hygge)’ 문화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비 내리는 오후에도 나를 온전히 받아주는 이 다정한 공간 자체 말이다.

‘제3의 장소’의 완성

지금 생각하면, 오디는 레이 올든버그가 말한 '제3의 장소(The Third Place)'의 끝판왕이자,

국가가 시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선물 같은 곳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 것 같다.


핀란드 국회의사당 바로 맞은편에 위치했다는 점이 상징적인데,

이는 "권력(국회)을 감시하는 것은 깨어있는 시민(도서관)이다"라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담기 위함이라고!

3층 북 헤븐(Book Heaven)의 전경

코펜하겐 왕립도서관이 공부와 연구라는 '목적성'이 강하다면,

오디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돈을 쓰지 않고도 하루 종일 머물 수 있는 안전하고 쾌적한 공공의 거실을 지향하는 것이다.


또한, 비싼 장비(레이저 커터, 게임룸 등)를 시민 누구에게나 대여해 줌으로써 정보와 기술의 격차를 해소하는 복지 모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복지국가의 면모를 체감할 수 있었다.

특히 2층에서는 벤치마킹 투어를 하는 단체 관광객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도서관의 편견을 깬 오디 Oodi

“여기선 조용히 할 필요 없어요~ 헬싱키의 거실이니까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북 해븐의 한편에 위치한 육아부모와 베이비를 위한 공간

북유럽 여정에서 만난 세 곳의 도서관은 각기 다른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넸다.


코펜하겐의 ‘블랙 다이아몬드(Black Diamond)’

지식의 권위와 현대적 세련미가 흐르는 '지성의 요새' 였다면

스웨덴의 말뫼 도서관(Malmö Stadsbibliotek)

숲과 빛을 품은 ‘자연의 서재’였고

헬싱키의오디(Oodi)’

시민의 삶 속으로 깊숙이 침투한 가장 민주적인 ‘모두의 거실’이었다.


이 거대하고 완벽한 공공의 환대를 뒤로하고 서울로 돌아오기 전,

나는 파리의 골목에서 또 다른 공간을 마주했다.

바로 ‘ORF Paris’를 떠올려본다.

7편에서 기록했던 그곳은 정돈된 시스템 대신 예술적 무질서가 흐르는 곳이었다.

세련되게 정돈된 북유럽의 도서관들이 국가가 보장하는 ‘공공의 안녕’을 상징한다면,

파리의 작은 서점들은 개개인의 취향이 뜨겁게 부딪히는 ‘현대적 살롱’에 가까웠다.

공간을 여행한다는 건,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있도록 환대해 주는 장소를 발견해 나가는 끝없는 과정인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정당한 시민으로 대접받는 북유럽의 거실에서 안도감을 얻고,

무심한 듯 다정한 파리의 살롱에서 날것의 영감을 채우며 나만의 문장을 고를 자유를 누렸다.

파리의 서점 'Ofr Paris' 전경

결국, 공간이란

형태가 무엇이든 ‘나’라는 존재가 타인과 연결되고 다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는 틈이어야 한다는 것.


10월의 찬 비를 뚫고 찾아갔던 오디의 온기와 파리 골목의 무심한 다정함 사이에서

나는 비로소 이번 여정의 마침표를 찍을 용기를 얻었다.


나를 환대하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여행은 계속될 것이기에.




에필로그


"Oodi"는 핀란드어로 '송가' 또는 '찬가'라는 뜻으로

'시민을 향한 찬가', '언어와 지식에 대한 예찬'

2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100년의 시간을 견뎌온 시민들의 삶에 바치는 가장 정중하고 아름다운 찬가인 셈이다.

그 이름을 곱씹어 보니,

오디에서 보낸 하루가! 왜 그토록 이 공간이!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기분이 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을 형상화 한 "Oodi" 그래픽
통창을 통해 핀란드 국회의사당을 마주하며 책을 읽는 Book Heaven 전경
핀란드산 가문비나무로 빚은 거대한 배를 형상화 한 Oodi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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