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의 소설 <무지개>는 한 소년의 삶을 다룬다. 소년은 무지개에 매료되어, 그것을 잡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무지개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잡힐 것만 같아, 그는 계속해서 무지개를 쫓는다. 하지만 어느 날 그의 손에 접힌 주름을 보고 자신이 노인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소설은 허황된 꿈을 쫓는다면, 우리도 소년처럼 정신을 차렸을 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노인이 되어 있을 수 있다고, 무시무시한 경고를 전한다.
하지만,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해서 올려다보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게 아무리 허황된 것일지라도. 만약 허황된 꿈조차 꿀 수 없는 세상에 산다면, 그 현실은 암흑일 것이다. 사랑하는 것, 정말 온마음 다해 좋아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금세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눈이 반짝거리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 사람은 빛난다. 어쩌면 중요한 건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허황된 꿈을 꾸지 못했다면, 비행기를 만든 라이트 형제도, 지동설을 주장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대에 따라 ‘허황됨’의 기준은 달라진다. 하늘을 쫓았던 라이트 형제는 하늘을 정복하진 못했지만, 결국 비행기를 만들었다. 우주를 쫓았던 코페르니쿠스도 우주를 잡지 못했지만 그 원리를 밝혀냈다. 결국 그들은 대상을 정복하진 못했지만,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갔다.
물론 허황된 것을 좇는 사람은 종종 바보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지개를 쫓을 용기. 두 눈에 반짝이는 별을 담을 용기. 즉, 허황된 용기. 우리가 허황됨의 기준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면, 세상은 조금 더 빛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