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알바 외에는 제대로 사기업을 잘 안 다녀봐서 모르겠지만 공기업에서 서류 작성은 개인적으로 참 싫어하던 근무 시스템이었다. 국토부 산하에서 좀 길게 그리고 외교부 산하에서는 짧게 일했지만 둘 모두 문서 작성이 일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Xx 씨 국토부에서는 이런 식으로 보고서 안 써요. 폰트는 이걸 쓰시고 앞에는 몇 칸을 띄우세요. 그리고, 첫 장에는 요약문을 쓰는데 박스에 집어넣으세요... 그리고 이런 거는 밑줄 넣으시고요. Xx 씨가 밑줄 넣은 건 이탤릭체로 바꾸세요..."그리고 그것을 해가면 더 자세히 들어갔다. 이 부분은 음슴체로 하시고 목차에는 이런저런 것을 더 넣으라는 답을 들었다. 그러고 나서 결재를 올리면...
"결재라인에 최 과장님 빼시고 김 과장님 넣으세요. 실무는 최 과장님이 맞지만 직제상 그러니까 김 과장님이 맞아요. 첨부 넣으실 때 본부장님 pdf 안 좋아하시니까 한글 파일로 다시 올리세요. 반려할게요."
"Xx아 사람들이 왜 결재라인에 집착하는지 알아? 나중에 감사 뜨면 이 사람들이 불려 가거든 그래서 귀찮을 건에는 이름을 안 넣고 싶어 해. 그리고 잘 되는 것에는 그 결재라인에 있어야 나중에 뭐라도 떨어지거든"
미국도 다양한 시스템이 있겠지만 내가 경험한 회사들은 결재시스템이 없다. 그리고 폰트 등 스타일은 알아서 하는 것이다 물론 더 보기 좋게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요한 의사 결정할 일이 있으면 관련된 사람들을 회의에 초대하여 거기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이메일 등으로 자료를 남긴다.
만약 내가 담당자라면 보고서를 만들고 관련된 스테이크홀더들에게 메일을 보낸다 "이번 기획안 이렇게 변경하려는데 괜찮아? 궁금한 거나 다른 의견 있으면 답줘" 그리고 참고할 사람들을 cc 한다. 그리고 답이 오면 그게 끝이다. 이게 한국의 결재와 가장 비슷하다. 본부장, 사장이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더 높은 직급이 프레젠테이션을 하겠지만, 이런 계획인데 진행할까요 묻고 그리고 그것의 답을 얻으면 그게 결재가 난 것이다.
이미 앞서 말했지만, 난 결재서류 작성이 참 싫었다. 당장 공공기관의 '보도자료'만 검색해도 그 경직성이 보인다. 형식뿐만 아니라 쓰는 단어들도 정해져 있다. 핵심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부서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로 교체하는데 시간을 소비한다. 물론 경력이 더 쌓이면 그런 것에 시간을 많이 소비하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공직사회의 정형화된 표현들이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내가 성장했다는 증거라면 내가 바라는 미래는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문서를 작성하고 메일을 쓰지만 결재에서는 자유로워졌다. 결재라인에서 실수로 누군가를 빼먹었다면 전화해서 "죄송한데 결재 다시 올릴게요 반려해 주세요" 하면서 작은 망신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가 빠졌다면 그냥 이메일을 포워드 하면 끝난다. 또 어떤 자료가 결재문서에서 빠졌다면 다시 올려서 그 라인등을 다시 밑에서부터 다 거쳐야 했지만 여기서는 다음 메일에서 "지난번에 실수로 첨부 파일을 빼먹었어 이번 메일에 첨부했으니 확인 부탁해"라고 쓰면 된다.
또한 한국의 결재시스템은 밑에서부터 하나씩 올라간다. 그 말은 누군가 한 명이 자리를 비워 일주일 해외출장을 갔다면 그 프로젝트는 정체된다. 하지만 이메일은 제일 위의 결정권자에게도 동시에 전달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제일 먼저 답할 수도 있다. 사실 대부분 그랬다. 왜냐면 그 사람이 답을 해야 진행되는 사항이기에 그렇다. 그 밑에 사람은 이의나 질문이 있을 때 전체 수신자에게 답을 한다. 그렇기에 의사결정이 빠를 수밖에 없다. 물론 이에 따른 필연적인 단점은 이메일이나 보고서에 실수가 많다는 것이다. 한국처럼 결재 올리기 전에 미리 상사에게 하나하나 검토를 받지 않는다. 큰 상황에서는 슬라이드를 시간을 두고 검토하지만 간단한 사항은 실수가 있어도 그냥 이메일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