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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구속 이중적 공간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

by 김영준

※주관적인 생각이 담긴 글입니다.(스포 포함)※


줄거리: 주인공 라즐로 토스(에드리언 브로디)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수숑소에서 나와 기회의 땅인 미국에서 자신의 전공인 제도사로써 친구와 동업을 하며 오스트리아에 발이 묵인 아내 아르제빗(펠리시티 존스)과 조카인 조피아(래피 캐시디)를 그리워한다. 그때 그의 능력을 알아본 사업가 해리슨 리 밴 뷰런(가이 피어스)은 그에게 최고의 건물을 지어보자는 제안을 하고 둘은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시작된다.


“브루탈리스트”는 오프닝에서부터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영화다. 처음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가로로 이동하는 크레디트는 기존 영화들의 것과는 다른 것이며 심지어 오케스트라 같은 영화음악 덕분에 악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 또한 사선에서 내려오는, 마치 더치 앵글과 같이 내려오는 엔딩 크레디트 또한 신선하고 독창적이다.


the-brutalist.jpg


“자유롭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인간만큼 노예 같은 인간은 없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한 명언 이자 영화 시작 후 곧바로 아르제빗의 편지의 인용되는 구절이다. 이 구절이 내레이션으로 읊어지며 라즐로는 배 밑에서부터 빛을 따라가 밖으로 나온 뒤 끝내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며 같이 있던 친구를 껴안으며 기뻐하고 있었다. 영화를 다 보고 괴테의 명언을 다시 보면 다른 느낌이다. 라즐로는 구속과 억압의 공간인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자유라고 생각한 미국에서 라즐로는 다시 한번 구속을 느끼게 된다. 늘 살갑고 베풀어 주던 미국의 사람들은 그 내면에 라즐로와 유대인이 미국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이중적인 외면과 내면을 가지고 있다.

1920x0.jpg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라즐로를 품어준 라즐로의 친구 아틸라의 아내 오드리는 라즐로를 모함하면서 까지 그를 쫓아냈고 그를 받아준 밴 뷰런 또한 처음 그의 천재성에 반해 동업을 제안하지만 후에 그의 천재성을 시기하며 그를 강간하며 그에게 거리의 창녀라는 모욕과 모멸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곤 다음날 아무 일 없는 듯이 행동하는 뷰런의 모습에 라즐로는 자기혐오를 느낀다. 라즐로가 생각했던 미국의 모습은 나치가 유대인에게 행했던 육체적 고통과 다른 정신적 고통 또한 선사한다. 영화 오프닝 자유의 여신상이 거꾸로 보이는 이유가 십자가를 거꾸로 매단 안티 크라이스트의 모습으로 느껴지며 자유를 갈망했던 라즐로의 기대를 전복시키는 복선이었다. 자유롭지 않으면서 자유라고 생각한 라즐로는 이미 노예가 되고 있었다. 라즐로에게 미국은 자유와 구속이 공존하는 이중적인 공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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