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리코르디아(Miséricorde) 리뷰
※주관적인 생각이 포함된 글입니다(스포포함)※
주인공 제레미(필릭스 키실)는 몇 년 전 같이 일한 빵집사장이 죽어 조문을 위해 고향마을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어릴 적 친구 벵상(장 밥티스트 뒤랑)의 엄마(캐서린 프로트)가 제레미를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해 주며 고향친구들과 오랜만에 재회를 한다. 그러나 재회도 잠시 뱅상은 제레미가 자신의 어머니에 집에서 계속 지내는 것을 못마땅해하며 다른 친구들에게도 제레미를 험담한다. 이런 날이 반복되자 참을 수 없었던 제레미는 숲 속에서 뱅상과 만나 몸싸움을 하게 되고 쓰러진 벵상을 돌로 내리쳐 죽이게 된다. 제레미는 시체를 숨기고 마을로 돌아오지만 제레미를 노려보는 신부와 실종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의 눈초리를 받으며 자신의 범행을 숨기려 한다.
미세리코르디아의 뜻은 자비, 연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영화중간에 신부가 벵상을 죽이는 제레미를 목격했음에도 신고하지 않고 따로 불러 자비를 베푸는 장면이 이 영화에 중요한 장면이다. 그러나 신부는 단순히 직업적, 성경의 의한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다. 그 뒤에는 욕망이 숨어있었다.
제레미가 처음 마을에 들어올 때 신부가 멀리서 제레미를 바라본다. 외지인이라서 그럴 수 있지만 아마 신부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여 간음하듯 바라본 것이다. 그 후 숲 속에서 신부를 만나며 신부가 딴 곰보버섯을 보게 된다. 버섯은 외형적으로 단순히 남성의 성기를 연상시킨다. 신부가 버섯을 한 바구니에 담아 가는 신부의 모습은 성적인 욕망을 갈구하는 은유가 담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 왜 그냥 버섯이 아닌 곰보버섯일까? 곰보버섯은 프랑스에서 나름 귀한 식재료로 사용된다. 그런 식재료는 외지인인 제레미로 대입해 보면 신부에게 제레미 같은 사람은 희귀하고 가지고 싶은 존재로 보인다. 제레미가 벵상을 숲 속에 묻고 시간이 지나 묻은 장소에 곰보버섯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그건 제레미가 살인한 것의 죄책감이 자라는 것이며 버섯을 계속 거두어도 다시 자라는 징글징글한 모습을 보인다.
제레미에 살인으로 벵상은 실종처리가 되어 형사가 제레미를 포함해 벵상의 가족과 친구들까지 면담을 한다. 형사에 수사는 단순히 공식적인 만남을 넘어서 제레미가 자는 상황에서 잠결에 수사를 한다. 형사에 이런 모습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 범죄에 가깝게 수사를 진행하는 것은 게이인 제레미에 모습을 탄압하고 비판적인 사회에 모습에 대입된다. 후에 나오는 벗은 신부와 제레미가 자고 있는 중에도 일부러 침대를 들추는 장면까지 형사에 모습은 미세리코르디아에 장르인 코미디에 부합하는 요소로 작용이 될 것이다.
제레미는 신부와 교회에서 만나 신부가 고해를 하고 제레미가 들어주는 전복된 관계로 고해성사를 한다. 신부는 제레미가 살인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가 사회에 나가도 큰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가 관대하고 자비로운 성인의 모습으로 보이기 위한 것이며 진정한 목적은 숨긴 상태이다. 시간이 지나 제레미는 죄책감에 자살을 하려 한다. 그러나 신부가 이를 막고 제레미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적을 밝힌다. 제레미와 사랑하기 위해 그를 신고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것. 제레미는 그런 신부가 싫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신부에 뜻을 따른다. 신부는 성직자로서 자비와 용서를 베풀지만 미세리코르디아에 신부는 성경과 신의 뜻을 오직 자신의 욕망실현을 위해 사용하는 간악한 인물로 묘사된다. 욕망을 절제하고 배제해야 하는 사람이 욕망 실현을 위해 자신의 직업을 이용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미세리코르디아는 욕망과 자비가 같은 의미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제레미도 만만치 않다. 신부와 함께 형사를 따돌리고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 제레미만 뱅상에 엄마에게 밖에 나온 것을 들키게 된다. 벵상에 엄마는 제레미를 데리고 제레미의 요청으로 함께 침대에 눕는다. 그러나 제레미는 벵상 엄마와 좀 더 붙어있고 싶어 하며 결국 손을 잡고 자게 된다. 제레미에 이런 행동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설명할 수 있다. 제레미는 게이로 빵집 사장이 죽었을 때 돌아온 이유는 단순히 가족 같아서가 아닌 사장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장이 수영복만 입은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한 이유도 근거가 된다. 그 후 고향친구 왈레트와 술을 마셔 취기가 오른 제레미는 숨겨둔 욕망을 왈레트에게 분출하기 위해 왈레트의 속옷으로 갈아입어 그의 몸을 더듬거린다. 왈레트는 당연히 거절하며 제레미를 내쫓게 된다. 그 후 벵상을 죽이고 집으로 돌아온다. 제레미는 성적으로 게이이며 그것을 숨기며 지냈다. 그러나 고향 마을로 오자 게이임을 밝히고 친구를 유혹하며 자신의 욕망에 제한을 조금 풀게 된다. 제레미는 고향마을로 오고 입을 옷이 없어 죽은 사장의 옷을 입게 된다. 그것이 처음에는 외투와 겉옷이었으며 마지막에는 그의 잠옷을 입게 된다. 이런 표현은 죽은 사장에 옷을 입음으로써 조금씩 죽은 사장에 영혼과 의식을 흡수하며 벵상 엄마의 집에 자리를 잡아가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마지막에 신부의 뜻을 따르는 것은 종교적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신부의 뜻을 따르는 것이며 엄마를 유혹하며 그녀와 잠을 자는 것은 그녀를 쟁취함으로써 마을에 거주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레미는 두 사람을 유혹하고 따르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 실현을 위해 두 사람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알랭 기로디의 영화는 이번 영화가 처음이다. 알랭 기로디의 영화 중 호수의 이방인이 꽤나 유명하지만 아직 보지 못했다. 알랭 기로디 감독특유의 원색적이며 황당한 코미디 요소는 내가 이전에 보았던 비슷한 퀴어장르에 처음 보는 스타일과 이야기전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