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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히려 더 좋다 May 17. 2023

독일 명이나물꽃 필 무렵

#독일생활 #하이킹 #명이나물

일판 메밀꽃이 피었다. 뒷동산 곳곳에 하얗게 소금을 뿌린 듯... 팝콘을 뿌려 놓은 듯... 온통 하얗게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 주변 하이킹 코스를 따라 걷다가, SAS 연구소 뒤편에서 노이부르크 수도원 (Neuburg Abbey)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왼쪽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만난다. 언덕을 따라 명이나물꽃밭이 하얗게 펼쳐지는데... 봉평의 하얀 메밀꽃 밭을 연상시킨다.


노이부르크 수도원 방향 산책길, 명이나물 꽃들이 온통 하얗게 피었다.
명이나물 꽃들이 옥수수 팝콘을 뿌려 놓은 듯 예쁘고(?) 앙증맞다.


명이나물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대략 이십오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상도 양산 어느 유명하다는 식당에서 저녁시간이었다. 나름 고깃집으로 이름값을 하고 있는 식당이었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저 그런 고기 맛과 텁텁함에 입맛이 물려가고 있을 무렵, 식당사장의 각별한 명이나물장아찌 대령이 명이나물과의 인상적인 첫(?) 만남이었다.


울릉도에서 직접 공수한 산마늘이라고 했다.


울릉도에서 나는 산마늘만이 명이나물이라고 했다. 울릉도에서 춘궁기에 먹을 것이 없어서 산마늘을 채취해 목숨을 이어갔다고 해서 명(命)이 나물이라고 한다고... 마늘 향이 강하고 생나물로 쌈을 싸거나, 양념에 찍어 먹기도 하고 장아찌로도 먹는다고 했다. 구하기도 매우 어렵다고 했다.

명이나물의 유래와 울릉도 명이나물장아찌의 희귀성을 설명하며... 울. 릉. 도. 를 강조하는 사장의 눈빛은 특별히 대접하고 있다는 분위기를 은근히 강요(?)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한 장의 파란 배춧잎(만 원짜리 지폐)이 사장의 손에 쥐어졌음은 물론이었다. 명이나물이 생각처럼 그리 흔하지 않았던 때였음이 틀림없었다.


명이나물 장아찌는 돼지 삼겹살이나 한우의 기름진 부위와 최고의 궁합을 보여주었다. 기름기로 텁텁해진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고 식욕을 다시 돋워 주는 역할을 했다. 잘 구워진 고기 한 점과 명이나물장아찌의 조화는 새콤하며 침샘을 자극하는 특별한 식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첫 만남 이전과 이후로도 살아있는(?) 명이나물을 본 적도 없었고 명이나물과 산마늘이 같은 것인지... 차이가 무엇인지조차도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우리 집 뒷동산에 하얗게 가득한 꽃들이 명이나물이라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선, 명칭에 있어서 울릉도산 산마늘만이 명이나물이라고 전제한다면 명이나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지 않겠으나.. 진위 여부가 명확하지 않으니 그냥 다들 부르는 것처럼 명이나물이라 부르고자 한다.


언덕을 온통 하얗게 뒤덮은... 살아있는... 명이나물꽃밭의 풍경을 처음 접했을 당시, 먹거리로서의 명이나물이 연상된다기보다는 오래전 봉평 이효석 문화마을에서 보았던 하얗게 뒤덮인 메밀꽃밭과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이 먼저 연상되었고 소설의 감상에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늙고 볼품없이 초라한 장돌뱅이 허 생원이 온통 소금을 뿌린 듯 하얗게 메밀꽃이 핀 달밤에 우연하게 정을 통한 처녀의 아들, 동이를 친자로 확인하는... 달빛에 젖은 메밀꽃이 흐트러지게 피어 있는 밤의 풍경... 서정적 묘사가 황홀하기 그지없다.


메밀꽃 필 무렵의 서정적 묘사가 절정인 부분...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조 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 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공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 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줏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 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 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나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 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허 생원 일행이 달빛 아래 메밀밭을 지나가는 장면에서 숨 막힐 듯 하얗게 뒤덮인 메밀꽃 밭... 달빛에 젖은 산길의 서정적 풍경묘사가 압권이었다. 더 이상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이 장면을 읽다 보면... 밝은 달빛과 하얀 메밀꽃이 어우러져 보여주는 고요하고 애잔한 풍경묘사에 소설의 묘사처럼 정말로 숨이 막히는 듯했다.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당시에는 (중, 고등..), 달빛 묘사보다는 허생원이 성 서방네 처녀와 물방앗간에서 난데없이(우연히) 마주치는 상상에서... 숨이 막히다 못해... 멎는 듯했었다.

그와 더불어, 아무나 글(소설)을 쓰면 안 되겠구나 하는 개인적인 확신을 갖도록 하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능력이 있어서... 이와 같은 묘사가 가능할까.. 이효석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오고는 했다.


현상이나 분위기를 묘사하는... 뛰어난 감각과 능력을 애초에 타고난 사람이 따.로.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연습으로 극복할 수 있는지 여부를 자문해 보는데... 가능하다는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글쓰기 소질이 잼병인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지속적인 글쓰기를 하고자 한다면 사물과 현상을 다각도로 관찰하고 묘사하는 연습을 매 순간 꾸준히 해야겠다는 결심을 해 볼 뿐이다.




뒷동산 명이나물 밭이 인위적으로 꾸며 놓은 것이 아니라 야생의 군락이라는 사실이 더욱 신선하게 와닿는다. 명이나물은 그늘지고 선선한 곳에서 잘 자란다고 한다. 독일의 (우리 동네) 낮은 습도로 인한 그늘의 선선한 날씨가 명이나물이 잘 자라는데 틀림없이 크게 한 몫하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추측이다.


가끔 네댓 살 먹은 꼬맹이를 대동한 젊은 독일 부부가 명이나물을 채취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리저리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며 나물을 뜯는 아이... 아빠, 엄마에게 채취한 식물이 맞게 자른 것인지 고사리손으로... 호기심에 가득 찬 눈길로 물어보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아빠, 엄마... 자연 속에 웃음 짓고... 따뜻하고... 행복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멀리서 훔쳐보는(?) 가슴도 행복감에 뭉클하다. 이들의 모습은 그날 꼭 명이나물의 채취만이 목적이 아닌 듯... 가족 간의 사랑과 행복을 더 풍부하게 해주는 그들만의 특별한 소풍으로 보였다. 옅은 연두색 나뭇잎사이로 쏟아지는 햇살과... 적절하게 선선한 바람과... 흔들리는 풀잎의... 가벼운 춤사위가... 행복한 풍경을 더 풍요롭게 해 주는 듯했다.


이 가족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렸을 적 즐겨보던 미국 드라마 로라 인걸스 와일더(Laura Ingalls Wilder)의 "초원의 집 (Little House on the Prairie)" 가족이 연상된다. 특히, 드라마 시작 오프닝 장면에서 초원 언덕을 뛰어다니는(내려오는) 꼬맹이 딸들과 강아지..(중, 장년층은 아마 대부분이 이 장면을 기억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 오프닝 장면에서 느꼈던 따듯하고 애잔한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경험을 하고는 했다. 왜 이 장면이 떠오르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어떤 현상을 보면 그와 연관되는 다른 현상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인간의 본능적인 지적 메커니즘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상태이나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외로워져 가는... 현재의 삶과 물질적으로는 약간(많이) 모자랐지만 가족 간의 따뜻한 정과 행복이 넘쳤던 과거의 삶, 어느 것이 진정 행복한 삶인지... 마음은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슬프게도 마음과 다르게 몸과 현실은 자꾸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음에 더욱 서글퍼진다. 현재 삶의 사슬에서 벗어날 용기도 없을뿐더러... 사슬의 굴레에서 비롯되는 피곤함과 외로움에 점점 지쳐가고 있을 뿐이다.


명이나물꽃 밭 한 귀퉁이에서 이 따스한 가족을 바라볼 수 있고, 잠시나마 작고.. 소중한.. 감성적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명이나물(자연)에 무한한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독일인들은 그날의 샐러드 해 먹을 정도로만 소량의 나물을 채취한다고 한다. 많은 양을 채취하다가는 벌금을 물 수도 있다고 한다. 감시관 같은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벌금을 무는 지는 알 도리가 없다. 벌금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우리의 장아찌와 같은 발효음식(명이나물에 한해서...)이 없으니 한 번에 많이 채취할 필요가 애당초 없었을 것 같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장아찌가 있으니 많이 채취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독일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명이나물을 채취해서 장아찌를 자주 담아 먹는다고 한다. 장아찌를 담으려면 좀... 많은 양이 필요해 보이니 채취양에 있어서 약간은 조심을 해야 할 듯하다. (독일인들도 명이나물을 페스토(Pesto)로 만들어 먹는다고는 하니... 그들도 많이 채취할 가능성이 있어 보이기는 한다.)


샐러드 용으로 채취할 때는 가급적 길가에 가까운 것보다는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거나 경사가 있는 자리에서 채취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길가에 위치한 것은 반려견의 실례(?)에 상대적으로 더 자주 노출될 가능성이 커서 위생상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라는 지인의 농담 반... 진담 반... 조언이다. 꽤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이미 하얀 꽃이 만발한 명이나물은 너무 거칠어서 식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늦었다고 한다. 이를 어쩌랴.. 하얗게 흐드러지게 핀 꽃 때문에 명이나물을 알게 되었는데.... 맛을 볼 수 없다니... 안타깝기가 그지없었다. 모든 것이 다 때와 타이밍이 있는 법이니 할 수 없다.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수밖에...


지금까지 명이나물을 바라보기만 했지 재미 삼아서라도 채취해서 직접 샐러드로 먹어보거나.. 장아찌를  담아본...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다. 지인이 만들어 놓은 장아찌로 삼겹살 파티를 한 적이 있다. 독일의 아파트에서 삼겹살을 굽는다는 것은 경험상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으나 지인의 집에서 성공적으로 할 수가 있었다. 잘 구워진 삼겹살에 명이나물로 돌돌 말아 한입 물었을 때의 새콤 달콤함... 그 맛의 조화를 잊을 수가 없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직접 나물을 채취해서 한번 장아찌를 담가볼 작정이다. 방법이야 YouTube에 널려 있으니 그리 어려울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해보지도 않고 너무 자신만만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메밀꽃처럼 하얗게 피어있는 명이나물 꽃 밭을 지나  하이킹 목적지인 수도원에 도착한다. 으레 그래왔듯이 수도원의 성당에 들러 스테인드글라스 빛의 축복 속에 잠시 묵상의 시간을 갖은 다음 수도원 뒤편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들러 둥켈(Dunkel) 맥주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는 한다. 돌아오는 방향으로는 온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는 방향과 다른 길의 몇 가지 선택이 있으나, 이날은 온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는 방향으로 선택을 했다.


아까 보았던(만났던)... 명이나물을 채취하던 행복한 가족도 이제 막 귀갓길을 서두르고 있는 듯했다. 강아지를 앞세우고 내려오는 꼬맹이 아들... 그 뒤로 아버지와 엄마... 나물 밭 샛길이 좁은 탓에 줄을 지어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강아지 뒤로 작은 나무막대기를 왼손에 쥐고 휘적휘적 거리며 뒤뚱거리는 귀여운 꼬맹이....

그 뒤로 행복한 표정의 젊은 아버지... 긴 나뭇가지를 역시 왼손에 휘두르며 꼬맹이와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가족 뒤로는 하얀 명이나물꽃이 햇빛을 받아... 소금을 뿌린 듯... 팝콘을 뿌린 듯...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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