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역사적 배경과 음악의 뒷이야기 그리고 새로운 해석의 발견
-베로니카 베치 지음
-노승림 옮김
오랜만에 조우한 옛 친구와 한바탕 재미난 씨름을 시작하고 있다.
서재 책꽂이 한 귀퉁이, 오랫동안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며 외로워했을 이놈(?)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책이 좋았다. (누군들 싫어하겠냐마는...)
예쁘고 적절하게 디자인된 표지와 장정된 종이의 재질이 주는 시각적, 촉감적 느낌... 막 출판된 신선한(?) 책 냄새가 좋았다.
어렸을 적... 이른 아침 대문 앞에 배달된 조간신문 냄새가 났다. 신문사에서 집 대문까지 신문을 던져 넣은 새벽 배달은 아마도... 부지런한 어느 고학생(苦學生)의 몫이었을 것이다. '신문이오'라는 새벽을 여는 외침에 이어 대문에서 안방까지 신문을 다시 배달하는 것은 아침을 시작하는 꼬맹이 몫이었다. 신문을 주우러 아침마다 매번 밖으로 나가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기쁨이었다. 신문을 막 집어 들었을 때 나는 신선한 활자 잉크 냄새가 좋았다. 집안 식구 중에 제일 먼저 냄새를 맡을 수가 있어서 좋았다. 지금은 종이신문을 보지 않아서 활자 냄새가 나는지 모르겠으나, 예전에는 막 배달된 조간신문에서 휘발성 활자 냄새가 진하게 났었다. (지금 책들은 활자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
밤사이 함박눈이 소복하게 내린... 어느 포근한(?) 겨울 아침, 대문 안으로 던져진 조간신문... 소복한 눈 위에 꼬맹이의 손길을 기다리며 눈 위에 살포시 올라앉은 신문... 하얀 눈과 신문의 검고 굵은 헤드라인이 자아내는 모습... 검은 활자가 눈 위에 직접 프린트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꼬맹이 수준에서 신문의 한자 내용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내용은 둘째 치고, 하얀 눈과 굵은 헤드라인이 만들어내는 완벽한 흑백 콘트라스트(contrast)에 잠시(아주 잠시) 넋을 잃고는 했다. (WOW.. 아름답다... 예술이다... 꼬맹이적 표현으로는 좀 과하다 싶지만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다.) 눈 위에 던져진 신문의 우연한 형태가 그냥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좀 이상한가?)
새 책을 손에 쥐었을 때, 그 약간의 어색함과 신선하고 매끈한 종이 촉감은... 무의식 속에 숨어있던 신문활자의 잉크 냄새와 오래된 유년 시절의 강렬했던 추억을 소환하는데 충분한 역할을 하고는 했다.
아내와 함께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대형서점이나 조그만 동네, 독립서점 등을 놀이터 삼아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이 더 적절한 표현 일지도..) 자주 들랑거리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언제 읽을지도 모르는 책 들이지만... 좋다 싶으면 일단... 사다 나르기에 바빴다.
그 나쁜(?) 버릇은 지금도 잘 고쳐지지 않고 있다. 이 병 때문에 방들이 항상 책으로 넘쳐나고는 했다.
느낌이 좋은 책들이 주 대상이지만... 언젠가는 읽겠지 하는 막연한 뿌듯함으로 카드를 긁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절대 부자는 아니다... 마음이 부자라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문. 제. 는. 책을 사다 나르는 토끼 같은 속도가 읽어야 하는 거북이 같은 속도를 항상 너무 앞서간다는 것에 있었다. 생활패턴도 편안하게 쉬면서 책을 읽는 것을 허락해 줄 만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읽지 못한고 미루어진 채로 쌓여가는 책이 넘쳐나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랬다. 책이 많아서 부럽기만 하다고...
서재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냥 뿌듯하고 흐뭇했다.
마저 읽지(소화) 못한 것들이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책이 차지하는 공간에 비례해서 지식이 많아진 양...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싶었다. 이 느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주인이고 책이 손님일 경우에 한해서만 유효했다.
'공간이 허용하는 경우에 한해서 행복감이 지속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공간의 제한으로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 책의 숫자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은 생활을 온통 아수라장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독일로 이사를 결정할 때가 그랬다.
상당량의 책을 처분해야만 했다. 꼭 간직하고 싶은 책을 기준으로 박스에 담아 친지와 지인에게 맡겨 놓기로 했다. 박스의 숫자는 누구에게 맡겨놓으면서, 최소한의 예절을 지키기 어려운 수준을 진작에 넘어서기 시작했다.
폐기처분을 결정해야만 하는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
기부처를 찾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헌책을 수집하는 사람은 무게로 달아서 폐지 값을 주고 가져가겠다고 했다. 가슴 저 아래에서 울컥 뜨거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 살과 피와 같은 것을 푸줏간의 고깃덩이처럼 무게를 달아 고물상에 넘겨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폐지(廢紙)'라는 단어(표현) 자체가 싫었다. 영혼이 사라진... 껍데기만으로 존재의 무게를 가늠하고 싶지 않았다.
직접 폐기하기로 했다.
남의 손에 맡기는 것보다 내 손으로 직접 의식(?)을 치르기로 했다. 내 품에 있었던 책의 영혼(?)을 달래며 떠나보내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로 했다.
다시는 절. 대. 로.... 더 이상.... 책을 사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함께 말이다. (수위가 높아 보인다... 진솔한 마음이기에 솔직하게 적는다. 물론 지킬 자신도 없다.)
책이 재산인 줄 알았는데... 결국 가슴 아픈 쓰레기가 되더라...(동의받기 어려운... 평지풍파를 일으킬만한 표현이지만 솔직한 느낌인지라...)
처치하기 곤란한 쓰레기... 버릴 때 마음이 아프고...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주제가 무겁거나 전문서적일 경우가 더욱 그랬다. (그렇게 비싸게 주고 구입했던 두껍고, 무거운 전문 서적들...)
간신히 살아남은(?) 일반 서적이라도 이미 여러 번 읽었거나 구입한 지 오래된 책일수록... 개구리 왕자 이야기 속... 공주님의 연못에 빠진 황금공이 되어있었다. 개구리 왕자의 손길을 빌어 공주님 품으로 다시 돌아갈 때를 기다리는 듯 깊은 연못(책장)에 가라앉아 있었다. 황금공을 다시 건져내는 왕자님을 만나지 못하는 한, 언젠가 결국 폐기처분이라는 마지막 단계를 향한 시간 여행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체 말이다.
추억과 정성이 담긴 책과 이별해야만 할 때... 사람과의 이별만큼이나 크게 가슴 한쪽이 아려 온다.
언젠가는 떠날 책들에게 기회가 되는대로 황금공을 건져내는 개구리 왕자님이 되어 주기로 했다.
건져낸 공은 내가 다시 가지고 놀아도 그만... 다른 공주님에게 선물해 버려도 그만이었다.
주제가 어려워서... 따분해서... 이미 읽었기... 때문에 먼발치에 있었던 놈들부터 하나씩 다시 건져보기로 했다.
이렇게 다시 깊은 연못에서 손위로 올라온 황금공(책)이 '음악과 권력'이다
原著의 제목을 번역하면 '음악가와 권력'임이 타당해 보였다.
옮긴이는 '음악과 권력'으로 제목의 폭을 좀 더 넓혀 놓았다.
더구나 원작과 표지 껍데기 디자인까지 싹 바꾸어 버렸다.
'왜? 그랬을까...'
책 겉장에서부터 옮긴이의 의도와 타당성을 화두 삼았다.
첫 페이지를 열지도 못한 채... 표지를 바라보면서 옮긴이와 수수께끼 게임을 시작했다.
왜? 제목부터 변화를 주었을까?
'번역가의 의무는 원작에 충실해야 한다'라는 것이 개인적인 철학이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제목/표지부터 달리 표현한 것은 파격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제목부터 표지까지 손댔다면 내용은 얼마나 손댔을까?' 순전히 근거 없는 개인적인 우려가 앞섰다.
옮긴이의 심오한 뜻을 알 도리는 없다. 다른 책에서 접하기 어렵고, 흥미로운 내용을... 심도 있게 음미해 볼 수 있게 해 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더욱 크다.
책의 내용을 일일이 다 소개하기에는 내용도 방대할 뿐만 아니라 주제넘은 일로 생각된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되기에 직접 탐독하기를 권한다. 음악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도 들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 지론이다. 소리 뒷면에 가리어진 작곡가와 음악의 배경을 안다면 좀 더 충만한 음악을 즐길 수가 있을 것 같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음악가들, 그들이 처했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에피소드를 알고 나면, 그들의 음악이 조금은 다르게 들릴 것이 틀림없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신년음악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라데츠키 행진곡'이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분명히 들어 봤을 것이다. 왈츠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만든 곡으로 오스트리아 영웅인 라데츠키 장군에게 헌정된 곡이다. 이 곡은 이탈리아(특히 베네치아)에서는 연주될 수 없는 한 맺힌 원수 같은 곡이다.
그 이유는, 1848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 일대에서 벌어진 이탈리아 반란(통일운동)을 매우 잔혹하게 진압한 사람이 라데츠키 장군이고, 그가 오스트리아 빈으로 개선할 때 그에게 헌정된 곡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이탈리아인 3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이곡이 이탈리아에서 공연될 수 있겠는가?'에 대한 대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당연히 No...
이탈리아인은 왈츠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라데츠키 행진곡을 만든 사람,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왈츠의 아버지'인 것도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진정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나폴레옹 전쟁과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잔혹하게 진압된 뒤, 최강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열강들이 빈에 모여 땅따먹기(국경)를 비롯한 전후 문제를 처리하느라 바빴다. 빈 회의(der Wiener Kongress) 장 밖에는 각종 로비와 사교활동을 위한 남녀 무도회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렸다. 춤곡은 단연 왈츠였다. 남녀가 밀착하여 흥청망청인 왈츠 무도회... 그 뒤는 안 봐도 비디오... 빈 회의가 끝나고 수많은 사생아가 양산(?) 되었다 한다. 오죽했으면 베토벤도 '왈츠는 쓰레기통에나 들어갈 저속한 음악'이라고 욕을 했을까... (욕을 했다는 설이 있다.)
이탈리아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제아무리 유명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라고 해도 현재 이탈리아에서는 그들의 신년 음악회 단골 메뉴인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신년음악회에서 '라데츠키 행진곡'을 들을 때, 뒤에 숨은 역사적 사실을 한 번 상기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재능 있는 위대한 음악가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흐름을 훨씬 더 잘 간파했다" - 게오르그 크네플러, 독일 음악학자
"수백 명의 자원 입대자를 모으는 것은 정치선전물이나 포스터로 불가능하지만 나팔과 북소리로 충분히 가능하다." - 콘스탄트 램버트, 영국 작곡가
음악이 인간의 심리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은 이미 기원전부터 널리 인식되었다. 정치적이 종교적 행사에 도구로 음악이 사용되었고 음악가나 작곡가는 성직자이기도 했다. 그만큼 음악은 국가나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부 음악가는 정치에 직접, 간접적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국회의원, 상원의원 그리고 폴란드 초대 대통령까지 한 음악가도 있었다.
왕정시대의 음악은 전적으로 성직자와 궁정의 전유물(소유물)이었다. 음악가들은 왕이나 귀족의 소유품으로서 생활의 지원이나 모든 후원을 그들로부터 받아야만 했다. 음악인으로 안정된 생활을 한다는 것은 곧 그들의 완벽한 부속품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궁정에 소속된 궁정음악가가 되어야만 했다.
공화정이 싹트고 계몽주의와 산업혁명, 프랑스혁명과 같은 정치적, 사회적 변혁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시민계급 탄생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시민계급의 구성원은 각자 새로운 지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아직 사회는 성숙한 시민의식에 부응하지 못한 불안정한 상태였다. 음악가들도 그들의 위치와 변화에 맞게 적응해 나가는 것이 필요했다.
음악가들은 조직화된 교양시민계급에 속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아직 귀족들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사회적 변화에 따라 재정적, 정치적으로 귀족들의 힘이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음악인들 또한 이들의 예속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런 와중에 일부 음악가들은 귀족과 갈등을 빚고 귀족들에게 찍히는 요주의 인물이 되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모차르트가 신동 시절 유럽의 여러 궁에서 화려한 명예를 누렸지만, 고향 동네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어느 한 대주교를 섬기면서 하인(궁정 음악가)으로 살아야 하는 처지였다. 주교는 모차르트를 무시하고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식탁에서 서열이 제일 낮은 곳에 앉아 식사를 해야 했고 그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대주교가 모차르트를 싫어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아마도 그의 자유분방한 행동과 생각이 대주교와 관계에 있어 민감한 선을 넘나든 것이 원인이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은 대주교에게 반항하고 빈으로 돌아와 더 이상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시대의 막을 올린다. 애당초 자유분방했던 그가 어디에 소속된다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지만, 그의 장래희망이 궁정음악가가 되는 것임을 생각하면 더욱 이상했다. 절대 왕정시대에 궁중 음악가가 귀족에게 대놓고 대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회적 변화 앞에서 힘을 잃어가는 귀족이라면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월급도 제대로 안주는 (못 주는) 귀족에게 할 말을 할 수도 있지 싶다. 인간이란 대체적으로 약한 자에게 강한 법이니까....
거장 음악가, 모차르트가 이처럼 홀대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조금은 생소하다. 하지만, 주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세상이 변했다고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신하가 주인에게 말대꾸하는 꼴도 보기 싫었을 것이다. 일부러 무시하고 급료도 제대로 주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고 시대가 변하는 것을 인정 안 할 수도 없고... 시대가 변하고 음악가들의 상황도 다른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점차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권력자들도 음악을 통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때에 따라서 음악가들을 감시하고 탄압하기도 했다. 일부 음악가는 물론 정치에 적극적으로 편승해 권력자들에게 아부도 하고, 권력의 곁에 다가서기 위한 적극적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음악과 권력은 서로의 이해타산에 맞게 수시로 균형의 추를 밀었다 당겼다 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음악가들,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바그너, 베르디, 쇤베르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쇼스타코비치 등을 비롯한 유명 작곡가들의 정치, 사회적 이야기가 비교적 자세하고 재미있게 설명된 이 책... 최근에 만난 가장 흥미로운 황금공이었다.
역사상 가장 악랄하고 기술적, 체계적으로 음악을 통제하면서 활용한 경우로 나치 독일을 들 수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나치에 의해서 철저히 활용된 경우였다.
히틀러는 침략 대상 국가에 군대보다 베를린 필을 먼저 보냈다.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로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주한 다음날, 여지없이 나치 부대의 군화 소리가 도시에 울려 퍼졌다고 한다. (옮긴이 글)
이러니 베를린 필은 나치가 보낸 침략의 전령사라는 오명을 쓰기에 충분했다. 감동적인 음악으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기습공격.... 아무나 할 수 없는 전술이다.
음악이 정치에 이용된 하나의 비극적 사례로 볼 수 있겠다.
독일 국가(國歌)는 1797년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이 신성 로마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왕이었던 프란츠 1세의 생일을 기념하여 '황제 찬가'를 작곡했다. 이 곡은' 신이여, 프란츠 황제를 보호하소서'로 바뀌어 1918년까지 독일 국가로 불렸다. 훗날 하이든은 현악 사중주로 '황제'를 작곡한다.
1948년 3월 혁명 당시 독일 민족주의 시인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 (August Heinrich Hoffmann von Fallersleben)이 황제의 선율에 가사를 붙여 '독일인의 노래'를 만들었다. 이 노래는 1922년 8월 독일 국가로 공식 채택되었고 1945년 5월 7일 연합국에 항복할 때까지 독일 국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금지된 국가가 1952년 3절 만을 국가로 하는 것을 조건으로 미국의 허락을 받아 지금까지 국가로 채택하고 있다. 1절과 2절에는 독일의 민족 우월의식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데다가 히틀러의 나치당이 오용한 전적 때문에 금지되었다.
민감한 정치 상황에서 음악(국가)을 이용하여 상황을 한번 정리하는 나치의 예가 있다. (영화이기는 하지만...)
음악의 효과는 비판을 한 번에 잠재우며 상황을 정리해 주는 엄청난 파괴력에 있어 보인다.
풍부하고 흥미진진한 역사와 음악의 뒷이야기...
새로운 음악적 해석이 가능한 행복을 누리면서...
아직도 탐독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