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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히려 더 좋다 Apr 18. 2023

걷기는 타임머신이다

걷기는 과거와 미래로의 시간 여행이다.

오늘은 어떤 놈(?)을 데리고 나갈까?


신발장에 나란히 정렬되어 주인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는 하이킹(Hiking)용 운동화들이다.

신발창이 얇고 비교적 가벼운 것부터 도톰하고 약간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까지 여러 켤레가 준비되어 있다.

차로 치면 BMW, 벤츠, 아우디, 포르셰, 람보르기니....

그날마다 기분과 날씨에 따라 하이킹 파트너를 선택하고는 한다.

마치 여러 대의 고급차(?)를 주차해 놓고 선택의 고민을 하는 가장 저. 렴. 한. (저렴할 수 있는) 사치였다.




날씨가 화창하고 기분마저 가벼운 날은 밑창이 얇고 무게가 가장 가벼운 놈을 선택한다.

이놈은 차로 치면  BMW에 가깝다. 서스펜션(쿠션)이 하드(Hard)해서 노면상태가 그대로 읽힌다.

땅의 요철을 통한 속삭임을 발바닥으로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바닥의 기운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걷기만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작은 행복이었다.


하이킹 코스의 길바닥 상태에 따라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느낌은 음식의 식감만큼이나 다양했다.

적당한 쿠션의 토양과 습기가 있는 흙길을 걸을 때는 맛있는 인절미의 쫀득한 식감 같은 것이 발바닥의 쿠션으로부터 느껴진다. 이와 다르게, 햇살에 밝게 노출된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표면 위의 작은 모래가 흩어진 길을 걸을 때는 바삭바삭한 유과(油菓)를 한입 물었을 때의 느낌이 발바닥으로 읽힌다.


발바닥으로부터 전해오는 다양한 느낌과 경쾌한 바닥의 인사소리.... 오늘의 코스를 맛있게 걸을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다.


약간은 피곤하고 컨디션이 그저 그럴 때는 밑창이 두툼하고 무게감이 조금은 있는 놈과 함께한다.

차로 치면 벤츠라고 할 수 있다. 승차감(착용감)이 부드럽고 피곤함이 덜하다.

이놈을 신었을 때 발바닥으로 부터 전해오는 땅의 인사와 식감(?)을 제대로 느끼기는 어렵지만, 포근함으로 걷는 내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컨디션이 좋지 않더라도 가능한 조금이라도 걷고자 노력했다.

한 번의 사소한 멈춤은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결심을 무참히 무너뜨리는 작은 도미노의 시작임을 의미했다.

그동안의 경험은 그것이 사실임을 매번 분명히 인지시키고는 했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으로 변하는 사태를 용납하고 싶지 않은 마음의 무장상태를 가능한 지키고자 했다.


매일의 걷기 목표를 달성하는데 몇 켤레의 신발을 준비할 것을 강력 추천한다. 애정이 포함된 신발과 함께하는 걷기는 덜 피곤하고 경쾌한 발걸음을 유지하는데 매번 큰 도움이 되고는 한다.


매일의 기분에 따라 신발을 바꿔주는 조그만 변화가 생각이상으로 효과가 있음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오늘의 가장 기분 좋은 차(신발)를 타고 시간여행을 위한 거리(하이킹 코스)로  홀로 나서 보자.

혼자 걷는 것이 타임머신을 타는데 가장 효과적이다. 시간여행을 하는 동안 동행자로부터 사색을 방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색은 타임머신 승차권이므로 오롯이 혼자일 때만이 더욱 효과적인 시간여행을 보장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화두에 깊이 빠져 주변의 사물이나 느낌을 전혀 인지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이와는  약간(많이) 다르게 온몸의 모든 감각을 자연을 향해 활짝 열어놓고 시간여행으로 인도할 자극제를 만날 자연스러운 준비를 해야 한다.


걷다가 만나는 촉각적, 시각적, 후각적 느낌과 자극은 사색과 더불어 효과적으로 과거와 미래로 우리를 인도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시간 속 자신과 다른 존재들 그리고 미래의 시간 속 자유로운 사유 속의 여행...




우리의 일상적인 하이킹 코스는 도시의 (Heidelberg)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었다. 살고 있는 집의 바로 뒤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항상 틈 날 때마다 산책을 하고는 했다. 집문을 나서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 네카(Neckar) 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몇 분만 걸으면  하이델베르크 구다리(Heidelberg Alte Brücke)를 만난다. 이 다리에서 동,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풍경이 장관이다. 특히 이른 아침 녘 동쪽에서 일어나는 운무와, 해 질 녘 서쪽의 노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침 녘 동쪽 해뜨기와 더불어 네카강을 따라 피어오르는 운무가 아침의 정경에 장엄함을 더한다.
해 질 녘 서쪽 하늘 붉게 물든 노을. 강물에 반사되는 노을과 막 켜지기 시작하는 가로등 불빛이 풍경에 진한 감성을 더한다.


잠시 다리에 올라 경치를 즐긴 다음 철학자의 길 방향으로 향한다. 철학자의 길 방향의 건널목을 건너자마자 바로 옆에 Schlangenweg를 만난다. 영어로 Snake way임을 생각하면 길의 생김새를 짐작할 수 있다. 꼬불 꼬불하고 조금은 경사가 가파른 좁은 골목길을 따라 언덕으로  오르다 보면 산 중간 지점에서 철학자의 길을 만난다.


철학자의 길로 오르는 좁고 꼬불 꼬불한 골목길 (Schlangenweg). 오래된 돌벽과 이끼,  닳아버린 돌계단에서 세월의 무구함이 느껴진디.


철학자의 길을 만나면 왼쪽과 오른쪽으로 두 방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첫 번째 선택인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시내 쪽으로 돌아 나오는 코스로 중간중간 아름다운 꽃들을 감상하며 시내를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다. 길 따라 위치한 전망대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는 풍경이 장관이다. 건너편으로 왼쪽에 아름다운 Heidelberg성이 보이고 그 밑으로 방금 전에 들렀던 Alte Brücke와 도도히 흐르는 Neckar강, 그 위로 여객선과 화물선이 오고 가는 풍경은 중세 화가들이 그려놓은 살아 움직이는 풍경화 그 자체였다.


철학자의 길 전망대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풍경. 멀리 하이델베르크 고성과 네카강을 가로지르는 테오도르 다리가 보인다.

철학자의 길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를 비롯한  철학자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 사회학자 베버 (Maximilian Carl Emil Weber), 소설가이자 시인 헤세(Hermann Karl Hesse) 등이 걸었던 산책로이기도 하다.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이름들이 실제 걸었던 (걸었을 수도 있는) 길을 따라 걸으며 사색 속에서 이들을 만나본다는 것은 아주 색다른 영혼의 울림을 선사한다.


철학자들이 즐겨 걸어서 "철학자의 길"이 되었다고 알려진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이와 달리, 또 다른 것은 Heidelberg 대학 학생들이 공부에 지친 머리를 식힐 겸, 이 길을 산책하면서 사색(철학)의 시간을 더 가지라고 해서 "철학자의 길"이라는 설이 있다. 


사유할 수 있는 철학의 시작은 책상머리 방구석이 아니고, 지속적인 움직임과 자연을 향한 열린 감각을 키우는 바깥 공간에 있음을 일깨우려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감각을 깨우치고, 사유하고 깨달음을 얻는 지름길중의 하나가 걷기(산책)에 바탕을 두고 있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암튼, 철학(사색)과 걷기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풍경을 충분히 감상한 뒤 천천히 Heidelbeg 대학 이론 물리학과 도서관 (Institute for Theoretical Physics Library)을 지나 시내 쪽으로 언덕을 걸어 내려오면 Theodor-Heuss-Brücke에 다다르기 바로 전에서 카페 Moro & More나 River Café 를 만날 수 있다. 한 시간여 정도의 하이킹뒤, 자신에게 선사하는 한잔의 에스프레소는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마지막 routin으로 하이킹의 마침표에 해당하는 필수적 절차였다.



두 번째 선택인 Schlangenweg에서 철학자의 길을 만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본격적인 숲 속의 초입이 시작된다. 왼쪽 방향의 길이 시종일관 포장된 시멘트 바닥이었던 것에 비해서 오른쪽 길로 가면 완전한 흙길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거대한 나무가 양쪽으로 서있고 이들로 만들어진 그늘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 보면 중세 수도원이 기다리고 있다. 가는 길 도중에 신발을 벗고 맨 발로 걷다가 중간에 만나는 맑고 고운 물이 흐르는 시냇물에서 발을 씻고, 지저귀는 새소리를 음악 삼아 듣고 앉아있노라면, 중세 화가들이 그려놓은 전원풍경 그림 속으로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고는 한다.


청아하고 신비스러운 자연의 냄새 (피톤치드 때문만은 아닌...)는 풍경그림 속의 한 주인공으로 앉아 존재하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다시 느끼고  감사하게 만들고는 한다. 숲 속의 하이킹 코스를 천천히 걷다 보면 시각적, 후각적, 청각적 그리고 감각적 느낌이 활짝 열려있게 된다. 키가 큰 나무 이파리 사이로 출렁이는 햇빛, 신비한 숲 속의 냄새, 지저귀는 조그만 새소리,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촉각은 자연을 만난다는 자체뿐만 아니라 과거의 회상을 기억하고, 그리움에 빠져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으로 자연스럽게 이끌려 들어가고는 한다.




하이킹 코스의 바닥상태에 따라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느낌은 음식의 식감(?) 만큼이나 다양했다.

적당한 쿠션의 토양과 습기가 있는 흙길을 걸을 때는 맛있는 인절미의 식감 같은 것이 발바닥으로부터 전해온다. 햇살에 밝게 노출된 아스팔트 위의 작은 모래가 흩어진 길을 걸을 때는 바삭바삭한 유과(油菓)를 한입 물었을 때의 느낌이다. 바닥의 소리에 집중하는 동시에 주변의 새소리 (노래에 가깝다... 쪼그만 녀석이 왜 이리 노랫소리는 큰지.. 나뭇가지 사이로 간신히 찾았다.)와 상쾌하고 청아한 숲의 향기는 과거로의 회상에 타임머신 기어를 한 단계 더 올려주는 역할을 하고는 했다.


바닥의 느낌과 풍경을 흠뻑 느끼며 산모퉁이 돌아 동네 골목길로 접어들면 담벼락에 피어있는 노란 개나리를 비롯한 이름 모를 꽃들의 향연이 까맣게 (정말... 평소에 전혀 생각나지 않았던...)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평소 기억에 전혀 없던 먼 친척... 동네 사람들...(그래서 최면술의 효과가 있는가 보다...)

꼬맹이적 친구들...

학창 시절을 같이 했던 그리운 얼굴들....

또. 다. 른. 그리운 얼굴 (in Puppy love).. (큰일 났다.. 아내의 추궁에.. 아직 대책이 없다...)


걷기는 잊고 있었던 그립고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고.. 대화할 수 있게 해 준다.



 

걸으면서 사색하고... 내면을 자극하는 주변의 자연과 모든 존재들...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잊고 있던 내면의 세계 속으로 우리를 안내하고는 한다.


과거로 데려가주기도 하고...


미래로 데려가주기도 하고....


현재로 데려와 준다.


걷기를 하면서 우리는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마음속의 감정들을 다스린다.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과의 (혹은 어떤 존재와도) 대화를 나누며, 놓쳤던 것들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과거에 대해 후회도 하고 용기를 되찾기도 한다.


걷기는 사유할 수 있는 지름길이고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타임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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