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간만 이렇게 늦게 가도 괜찮은 걸까?

#시간#여행#사유#제주도#포도뮤지엄#블랙홀#성찰#성당

by 오히려 더 좋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의 양은 같다.

시간의 속도는 다르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매일 미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분주한 일상에서 잠시 거리를 두고 내면(영혼)을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신앙심이 깊은 집사람의 제안에 잠시도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성당은 영혼을 성찰하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였고, 결정은 자연스럽게 내려졌다.


매일 미사는 고열 환자에게 처방된 해열제처럼 지친 마음을 서서히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일상의 피로에 감염된 듯 무겁던 영혼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해열제의 주성분은 미사와 묵상이었다.


이시돌 목장 옆 금악 성당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성 클라라 수도원, 금악 클라라 성당 입구


성당 건물 전경


성당 앞 새미 은총의 동산: 한 바퀴 걸으면서 묵상하기 참 좋다

숙소에서 가까운 이유도 있었지만, 성당이 품고 있는 고요한 분위기가 선택을 쉽게 만들었다.

성당 입구로 들어설 때, 키 큰 나무와 숲이 성당을 감싸안고 있었다.

아침 공기에는 신선한 나무 냄새가 배어 있었고, 적당한 습기를 머금은 상쾌한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머릿속까지 맑게 씻기는 느낌이 있다면 아마 이런 것일까 싶었다.


미사 전후 잠깐 들르는 "새미 은총의 동산"이 성당 바로 앞에 있다.

걸으면서 사유하거나 묵상하는데 최적의 장소였다.

금악 성당을 매일 미사의 첫 번째 장소로 선택하는데 하나의 큰 이유이기도 했다.


제주에서는 시간을 아주 천천히 보내기로 했다.

그 시간 속에는 대부분 묵상, 기도, 성찰, 독서 그리고 사유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음이 가라앉자, 시간이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제주에서 우리(집사람과 나)의 시간은 확연하게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제주라는 강한 매력이 시간을 붙잡아두는 듯했다.


마치 거대한 중력이 주변의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블랙홀처럼...

이 섬 곳곳에 숨겨진 블랙홀을 하나씩 찾아 나서기로 했다.




미사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탁 트인 시야와 전원 풍경 속에서 천천히 여유로운 운전을 하고 있었다.

앞뒤로 차 한 대 없는 길 위, 속도를 늦추는 일에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느린 주행 속에서 풍경과 시원한 공기가 온전히 마음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기분 좋은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포도 뮤지엄"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이름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오래전에 머물렀던 "포도 호텔"이 근처에 있다는 기억이 떠올랐고, 두 공간 사이의 어떤 연결고리를 찾기 시작했다.


"SK가 포도 호텔을 인수했으니... SK가 만든 뮤지엄 아닐까?"

집사람의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그럴 수 있겠네... 뮤지엄에 포도라는 단어를 쉽게 쓸 수는 없지..."


집사람은 이내 휴대폰을 꺼내 들었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검색에 들어갔다.

집사람의 추측은 정확했다.


"들러봐야지... 당. 연. 히..."

동시에 대답하고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같은 생각을 했다는 의미에서)


자연스레 운전대는 뮤지엄 쪽으로 향했고, 차는 방앗간 참새처럼 주차장 한 곳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뮤지엄 안에는 예상보다 풍성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공간 자체의 분위기와 전시된 현대미술 작품들이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중 한 작품이 특히 발걸음을 붙잡았다. (고유한 내 시간의 속도는 어느 정도일까? 작가 이완)

고유한 내 시간의 속도는 어느 정도일까?- 작가 이완 Lee Wan

하얀 방 안을 수백 개의 하얀 벽시계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각각의 시계에는 사람의 이름과 직업, 그리고 국가가 적혀 있었고, 시곗바늘이 저마다 다른 속도로 움직이며 불규칙한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협화음처럼 들리던 소리가 어느 순간 묘한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작가는 인터뷰한 사람들의 노동 시간과 식사비를 바탕으로, 각기 다른 삶의 속도를 시계로 구현해 놓았다고 했다. 물리적으로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과 시스템 속에서, 각자가 다른 시간의 속도로 살고 있는 것이다.


유난히 빠르게 돌아가는 한 시계에 시선이 멈췄다.

그 바쁜 진동이 내 심장의 박동과 겹치며 묘한 먹먹함을 남겼다.


이 방 한쪽에 내 시계를 걸어 둔다면 어떤 속도로 움직일지 생각해 보았다.

작가의 기준이 아닌, 내가 체감하는 삶의 시간으로 말이다.




마음속의 시계를 응시했다.

그것은 절대 빠르지 않았다.


느려서 행복한 걸까?

느리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내 고유의 시간 속도는 어디쯤 놓여 있을까?

이 속도로 계속 살아가도 되는 걸까?


질문들은 쉽게 답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쩌면, 해답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그 질문들과 함께 사유하는 과정일 것이다.


당분간 삶의 속도를 의식적으로 늦추기로 했다.

대신 사유와 성찰의 끈은 놓지 않기로 했다.


포도 뮤지엄은 적어도 오늘 하루, 내 시간을 느리게 만든 또 하나의 블랙홀이었다.

그 안에서 시간과 삶의 방향을 잠시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성당에서 느꼈던 그 감각처럼 말이다.


다음 블랙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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