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행#커피#바다#여유#건강#기억#추억#자장면
- 특별한 장소가 특별한 맛을 만든다.
- 당구장과 짜장면의 추억
- 파도가 보이는 자리에서 드립커피 한잔
당구장과 짜장면
학창 시절, 당구에 비상한 실력을 지닌 선배가 있었다.
그는 유난히 후배들을 잘 챙겼고, 그것을 마치 자신의 역할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그를 따라 술자리와 당구장을 자주 드나들고는 했다.
드물게는 강의를 빼먹고 함께 나선 적도 있었다.
스리쿠션 내기 당구를 칠 때 그의 눈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강의실에서 보던 눈과는 전혀 달랐다.
당구대 앞에 서면 그의 시선은 유리처럼 반짝이고 날카로워졌다.
공의 배치를 훑는 잠깐 사이에 입사각과 반사각, 미세한 스핀까지 정확하게 계산하는 듯했다.
이어서 큐 끝이 타점을 향해 움직이고, 공은 계산된 궤적을 따라 거의 예외 없이 점수로 이어지고는 했다.
낙제점에 가까운 그의 물리 과목 학점보다 당구대 위에서 드러나는 그의 물리학적 감각이 훨씬 더 경이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는 내기 당구(천 원짜리 죽빵)에서 좀처럼 지는 법이 없었다.
묘기에 가까운 샷이 터질 때마다 주변에서는 탄성과 원성이 뒤섞여 흘러나왔다.
민감한 승부처마다 상대가 던지는 어떠한 방해공작(구찌 갠세이)에도 그의 집중력은 한 치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불꽃 튀기는 한 게임이 끝날 무렵이면,
누군가 언제 시켰는지 모르는 중국집 짜장면이 배달되곤 했다.
당구장과 짜장면,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당구장에서 먹는 짜장면은 유난히 맛있었다.
게임을 이어가며 허겁지겁 자장면을 먹는 불편한 동작, 이기고 지는 사람들의 엇갈린 표정,
분 단위로 흘러가는 당구장 특유의 긴장감과 우정이 한데 뒤섞여 있는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먹는 짜장면 맛은 평범한 음식이 주는 그 이상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맛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같은 배달처 중국집을 찾아가 다시 먹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맛은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당구장에서 느꼈던 그 특별한 맛은 어디에도 없었다.
같은 짜장면인데 맛은 달라도 아주 달랐다.
결국 그 맛의 비밀은 음식 자체가 아니라 장소와 상황, 그리고 그 시절의 분위기에 있었던 듯싶다.
지금까지 먹어본 짜장면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한 그릇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그 당구장의 짜장면을 떠올린다.
지금도 고급 중국 식당의 정갈한 그 어느 짜장면도 그 맛의 기억을 대신하지 못한다.
특별한 장소와 추억이 빠진 음식은 애초에 비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작 내 당구 실력은 형편없었다.
아무리 애써도 일정 수준을 넘지 못했고, 결국 당구는 친목을 위한 취미로 남았다.
대신 그 시절의 당구장 장면과 짜장면 맛은 또렷한 기억으로 오래 남아있다.
자연과 드립 커피(Drip coffee)
제주를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여러 카페에 들렀다.
산책이나 드라이브를 하다 잠시 쉬고 싶을 때면, 눈에 띄는 카페나 처음 보는 공간을 찾았다.
커피에 진심인 우리는 거의 매번 따뜻한 드립 커피를 주문했다.
원두의 향과 컵 노트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방식을 우선시했기 때문이었다.
훌륭한 커피를 내는 곳도 많았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곳도 적지 않았다.
어느 화창한 날, 우리는 아예 밖에서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시기로 했다.
차 트렁크에는 접이식 의자와 테이블, 뜨거운 물이 담긴 텀블러, 그라인더와 드리퍼까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마음에 드는 장소만 찾으면 충분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바다를 마주하고 천천히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집에서 늘 하던 절차였지만, 공간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앞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뒤로는 멀리 한라산 가까이는 산방산이 포근하게 둘러서서 우리를 지켜보는 듯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즐겁게 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부모님의 따뜻한 시선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따뜻한 햇볕과 부드러운 바람 속에서 커피 향이 천천히 퍼졌다.
정성껏 내린 커피를 우리가 늘 쓰는 머그잔에 따랐다.
한 모금 입에 머금는 순간, 바다의 냄새와 바람의 감촉, 햇살의 온기가 커피의 향과 함께 밀려오는 듯했다.
같은 원두로 내린 커피인데도 맛이 놀랄 만큼 달랐다.
공간이 감각을 바꾸고, 감각이 기억을 새로 쓰고 있었다.
그 순간 오래전 당구장에서 먹던 짜장면이 떠올랐다.
장소와 분위기가 음식의 맛을 다르게 완성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집사람은 머그잔까지 주인따라 소풍을 나온 것 같다며 웃었다.
익숙한 물건도 낯선 풍경 속에서는 새롭게 빛나는 듯 했다.
결국 맛이라는 것은 단순히 혀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 함께하는 사람, 그 시간을 둘러싼 분위기가 어우러져 비로소 하나의 기억으로 완성된다.
그 기억을 바탕으로 어떤 음식은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맛으로 모습을 드러내고는 한다.
제주 바닷가 커피는 그렇게 특별한 맛과 기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같은 음식이라도 장소가 다르면 그 맛이 다르다.
글이 길어질 것 같아 언급하지 않은,
- 비행기와 라면
- 소풍과 김밥 그리고 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