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읽으며 건강을 찾다.

#여행#사색#제주#고민#희망#자연

by 오히려 더 좋다
한 달 정도의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뒤,
확연하게 몸과 마음이 밝아졌다.

여행 마지막 자락,
불청객인 감기와 독감의 회색빛은 전체적인 밝음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였다.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여행의 목적을 정의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번 여행의 슬로건을 "빈둥빈둥"으로 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꼭 해야만 하는 의무감과 계획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도 수행할 체력이 안 된다는 아쉬운 상황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집사람과 나) 둘 다 배터리로 치면 거의 방전상태로...

빨리 충전하라는 빨간색 경고등이 들어온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빈둥거리면서 몸과 마음에 필요한 에너지를 충전하기로 했다.

대부분이 무계획적이었고 순간적인 의기투합으로 충전의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 결과는 생각보다 효과적이고 매우 훌륭했다.


'음... 오늘은 무엇을 하지...'


"여보야... 도서관 가자"

아침 식사 중 습관적으로 한마디 건넸다.


왜 도서관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는지 스스로도 순간 의아했다.

순간의 의아함을 뒤로하고, 제주도에 있는 도서관이 궁금했다.

시골 도서관이 어떤지 궁금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몰랐다.


"근처에 찾아봐라... 도서관이 있는지?"

아무런 반대 의견 없이 흔쾌히 대답한다.


항상 더 좋은 대안은 없는지 물어보던 집사람의 패턴에서 벗어나 조금은 어색했다.

무슨 도서관이냐는 핀잔을 들을까 봐 약간(아주 살짝) 긴장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순간적으로 도서관을 생각해 냈던 것은 순전히 아무런 계획이 있지 않았던 탓이 컸다.

능동적인(?) 빈둥거림이라면 도서관도 꽤 괜찮은 선택이지 싶었다.


즉시 몇 개의 도서관을 검색하였고,

검색된 장소들은 아주 가까운 곳부터 멀어봐야 20km 내 근거리에 있었다.

마음이 내키는 곳으로 출발하면 그뿐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제주도민에게는 20km라는 거리가 육지에서 도의 경계를 넘어가는 정도에 해당하는... 심리적으로 꽤 먼 거리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마다 지역마다 동일한 물리적 거리가 엄청나게 다른 심리적 거리가 될 수 있음을 새삼 느끼고는 한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 생각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배제하자'는 교훈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몇 개의 도서관 후보 중에 '삼매봉 도서관'으로 정했다.


이곳을 정한 이유는 규모도 적당했지만, 점심 메뉴도 아주 훌륭하다는 것이었다.

검색된 다른 도서관은 점심을 제공하지 않는 조그만 도서관이었고 방문을 다음 기회로 미루어 두었다.


책이나 잡지를 읽으면서 조용히 시간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책을 읽기 위한 책상이나 의자 공간이 넉넉해서 좋았다.

책 읽는 다른 사람과의 거리를 충분하게 둘 수가 있어서 더 좋았다.

모르는 사람이 아주 가까이 바로 옆에 있으면 불편함이 더하기에 적당한 공간적 거리는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다가 점심시간이 기다려지고는 했다.

식당에 내려가 점심을 먹는 즐거움은 오랜만에 느끼는 추억의 경험이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시립 도서관에서 공부하러 갔던 오래된 기억이 난다.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 없고 온통 매점만 들락거리던 그 시절 말이다.

지금도 도서관 하면 매점이 먼저 떠오르니, 아마 그때 그 시절 문제아가 틀림없었나 보다.

모범생은 결단코 아니었다.


책 읽다가 싫증이 나면... 잠시 내려가서 공원을 거닐며 시간을 보내고... 걸음이 가는 대로 가다 보면 바닷가로 가서 바닷바람, 파도소리 그리고 새소리를 듣다 보면 하루가 기운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제주도에 있는 도서관이라는 곳은 거의 다 다녀 보았다.

도서관 방문이 꼭 목적은 아니었으나 지나가는 길에 겸사겸사 방문의 빈도가 더 높았다.

도서관에 들락거리는 빈도수가 높아지면서 무계획이 약간의 계획으로 수정되기 시작했다.


"여보야... 오늘부터 일일일책(一日一冊)하자"

집사람이 스치듯 제안했다.


하루에 무려(?) 한 권의 책을 읽자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제안한 것이었다.


"좋아... 굿 아이디어"

순간적인 동의는 했지만, 마음은 아차 싶었다.

무계획에 어긋나는 제안이기에, 반대의견을 제시할 강력한 권리가 있었는데 무심코 포기한 셈이 되어버렸다.


이 동의는 '하루를 도서관에서 시작해야 한다... 한 권을 읽어야 한다... 몇 시간은 도서관에 머물러야 한다...'라는 계약서에 서명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순식간에 올가미에 걸린 토끼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책과 함께'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올가미에 걸린 토끼치고는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어차피 빈둥거리는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이고, 하루에 한 권 정도면 앞으로 삼십 권 정도는 읽을 것이다.

이 정도면 한 달 안에 조금이라도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섰다.


사람이 되려고 한 달 동안 마늘하고 쑥만 먹는 곰에 비하면,

책 삼십 권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결과적이지만, 여행 동안 읽은 책은 삼십 권을 훌쩍 넘었다.

책을 빨리 읽는 습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 번 몰입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기에 하루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책의 숫자를 이야기하다 보니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책을 몇 권 읽었다고 자랑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많이 읽었다는 사실보다 얼마나 제 것으로 소화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문장을 가지고도 몇 날 며칠을 고민할 수도 있는데,

많이 읽었다는 사실에만 초점이 맞춰져서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암튼, 독서는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고 사색의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책은 무조건 읽는 것이 안 읽는 것보다는 낫다. (뻔한 이야기지만)


집사람의 우연한 기회에 우연히 제안한 '책과 함께'가 이번 여행에 있어서 훌륭한 이정표가 되었다.

무모해 보였던 계약에 너무 쉽게 도장을 찍은 것은 아닌가 했으나 아주 탁월한 선택으로서 판결 났다.


실내에서 '책과 함께' 프로젝트로 삼십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면,

실외에서는 '자연과 함께' 프로젝트로 가름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양의 자연을 읽었다.


눈으로 읽었고 귀로 읽었고, 피부로 읽었고, 발과 머리로 읽었다.


자연에 쓰여 있는 내용은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감동이었고 눈물이었다.

발길이 닿는 한 걸음 한 걸음, 눈에 보이는 장면 하나하나가 책 페이지 한 장 한 장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제주의 숲속 싱그러운 냄새...

하늘 향해 활짝 뻗은 편백나무...

쏟아져 떨어진 붉은 동백꽃의 향연...

숲속을 가로지르는 사슴(노루)...

숙소의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의 윤슬...

밤바다 갈치 잡이 배에서 작은 불빛의 반짝임...

쏟아지는 함박눈의 포근함과...

바닷가 파도 소리...

귓잔등을 애무하는 시원한 바람과 그 감촉...

갈대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

밤하늘 위로 보이는 별자리들...

카페 창가에 앉아 도란도란 사랑을 속삭이는 커플...

.......

.......


눈에 보이는 하나하나의 제주 풍경과 경험....


책이 내면을 더욱 단단하게 해주는 것 이상으로, 자연이 읽으라고 열어준 책장은 영혼의 에밀레종처럼 울림으로 다가왔다. 몸과 마음(영혼)이 더욱 단단해 짐을 느낀다.


말이나 활자로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표현할 방법이 없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