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으로 돌아가 자신의 어린 왕자를 만나다.
무작정 떠나기로 했다.
결심은 충동에 가까웠지만, 그 안에는 오래 쌓여온 피로가 내면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과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 보이지 않는 마찰음들이 더는 견딜 수없을 만큼 커져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그 소음에서 벗어나 있기로 했다.
머물 곳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준비에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될 만큼 가까울 것, 그리고 한 달 남짓의 시간을 보내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장소이어야 했다.
무엇보다 최근 들어 눈에 띄게 약해진 집사람의 건강을 생각하면, 해외보다는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계절의 따뜻함이 더한 곳이어야만 했다.
선택지는 자연스럽게 좁혀졌다.
목적지는 제주였다. 곧바로 조용히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이번 여정의 목적은 관광이 아니었다.
어디를 보느냐보다 어떻게 지내느냐가 더 중요했다.
무엇보다 숙소선정에 신중을 기울였다.
우리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기로 했다.
숙소는 일주일 단위로 옮기기로 했다.
혹시라도 맞지 않는 공간에 오래 머물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선택은 결과적으로 이번 여정을 지탱해 준 가장 현명한 판단이 되었다.
지나간 뒤에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지만, 이 결정만큼은 그때도, 지금도 분명히 옳았다는 생각이다.
오래 머무를 계획이었기에, 렌터카를 이용하기보다는 차를 직접 가져가기로 했다.
그 선택은 곧 배편을 이용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늘 당연하게 여겨왔던 비행기 여행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예고하고 있었다.
새벽 한 시 반에 목포에서 출발하는 페리호에 차를 싣기 위해 우리는 저녁 무렵 목포에 도착했다.
선착장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특별한 목적 없이 항구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낯선 도시에서는 걷는 일만으로도 충분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도시를 느끼고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약국에 들러 뱃멀미약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정된 시간에 맞춰 페리는 제주를 향해 출발했다.
다섯 시간 남짓 이어질 밤의 항해를 고려해 2인용 객실을 선택했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객실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열 마리의 양을 세기도 전에 잠에 빠져들었고, 이내 도착을 알리는 방송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작은 객실의 선창 너머로 제주항의 불빛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순간, 오래전 전신마취를 하고 건강검진을 받던 기억이 떠올랐다.
“속으로 열을 세세요. 곧 마취에 들 겁니다.”
간호사의 낮은 목소리에 하나, 둘, 셋을 세다 말고 의식이 끊겼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말.
“일어나세요. 다 끝났습니다.”
정말 한순간이었다.
과정은 사라지고 시작과 끝만 남는 경험. 잠들었다기보다는 기억이 빠져나간 시간에 가까웠다.
불편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스치는, 묘하게 어색한 순간이었다.
이번 항해도 비슷했다. 배에 오른 기억과 도착한 기억만 또렷할 뿐, 그 사이의 시간은 말끔히 비어 있었다. 뱃멀미를 하면 어쩌나 괜한 걱정을 했지만, 오히려 숙면을 취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나와 집사람은, 뱃멀미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숙소에 짐을 풀고 나서 우리는 곧바로 산책을 나서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면 걷기이기도 하고, 드라이브이기도 한 느슨한 외출이었다.
길을 나서며 가장 먼저 한 일은 근처에 도서관이나 북카페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특별한 목적지라기보다는, 필요할 때 조용히 머물 수 있는 장소 하나쯤을 마음속에 확보해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분명했다.
쉬는 것, 거창하거나 복잡한 일정은 애초에 세우지 않기로 했다.
무엇을 꼭 봐야 한다거나, 어디를 반드시 가야 한다는 목록도 만들지 않았다.
마음이 가는 곳이 있으면 그곳으로 향하고, 딱히 발길이 움직이지 않는 날에는 그냥 숙소에 머무르기로 했다.
계획을 줄이는 일이 오히려 이 여행의 가장 중요한 준비였다.
그렇게 우리는 산책에 나섰다.
우리(집사람과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제주에 올 때마다 한두 코스씩, 그렇게 올레길을 걸어왔고, 이제는 거의 전 구간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제주의 풍경을 싫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바다도, 오름도, 돌담길도 모두 각자의 얼굴로 마음에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꼽으라면, 송악산 쪽에서 산방산을 바라보는 풍경이다.
송악산 쪽에서 산방산을 향해 천천히 걷고 있으면, 가슴과 마음뿐 아니라 눈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시야가 트이면서 숨이 깊어지고, 생각은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평소 눈이 좋지 않은 편이라 이 ‘시원함’은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잠깐 스쳐가는 감각이지만,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아주 진귀한 순간이다.
그 풍경 앞에서는 무엇을 더 바라지 않게 된다.
그저 걷고, 보고, 숨 쉬는 일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게 된다.
산방산을 바라보는 풍경이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보이니."
풍경이 그렇게 묻는 것만 같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산의 윤곽을 바라본다.
굴곡이 완만한 능선, 단순해 보이는 형태.
"모자. 중절모 같은 것"
어른의 눈은 늘 그렇듯 빠르게 결론을 낸다.
대답은 즉각적이고, 안전하다. 틀릴 염려가 없다.
그러자 풍경이 다시 묻는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아니, 더 생각해 봐"
그제야 시선을 오래 두고 본다.
형태를 정의하려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그림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면 그 안에서 다른 소리가 고개를 든다.
"아,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같아"
어릴 적 읽었던 '어린 왕자'의 첫 장면이 불쑥 떠오른다.
어른들은 모두 모자라고 말했지만, 아이(어린 왕자)만이 단번에 그것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던 이야기.
그 대답은 논리보다 감각에 가깝고, 판단보다 상상에 가까웠다.
그 순간, 풍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딩. 동. 댕."
정답을 맞혀서가 아니다.
다시 한번,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산방산 풍경은 그렇게 서서, 묻고, 기다린다.
우리가 너무 오래 편견으로 가득 찬 어른으로만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아직도 마음속 어딘가에 대답할 줄 아는 어린 왕자가 남아 있는지를.
나는 옆에서 걷고 있는 집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여보야, 저 풍경을 보면서 떠오르는 게 없나?”
“내 눈에는 꽤 재미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집사람은 잠시 산방산 쪽을 흘끗 바라보더니, 무심한 어른의 얼굴로 대답했다.
“그냥 조그맣고 이쁘장한 산이지. 연상될 게 뭐 있나.”
나는 웃으며 다시 물었다.
“나는 저기서 코끼리가 보이는데, 여보는 안 보이나?”
“잠깐 있어봐라.”
집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조금 전과는 다른 눈으로 풍경을 바라보았다.
한 번 더, 조금 더 오래 시선을 두고 본 뒤였다. 그리고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야… 내는 저기서 코끼리도 보이고, 뱀도 보인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말이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그 순간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같은 풍경을, 같은 마음의 높이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기뻤다.
조금 전까지는 서로 다르게 보이던 풍경이었다.
어른의 시선을 잠시 내려놓고, 오래 전의 동심으로 돌아가자 풍경은 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놓였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단순한 산의 형태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겹쳐진 장면이었다.
아마도 이번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쉬겠다는 명분으로 떠났지만, 실제로는 잊고 지내던 감각과 시선을 하나씩 되찾는 시간 말이다.
여행의 결과물은 기념품처럼 눈에 띄게 남지 않더라도, 이런 순간의 형태로 조금씩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서 『어린 왕자』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책이 지닌 상징이나 해석을 덧붙이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만, 그날 산방산 앞에서 우리가 나눈 웃음이 가리키는 방향만은 분명했다.
어른으로 살아가다 보면, 세상은 점점 형식화되어간다. 모든 것은 설명 가능해야 하고, 논리적이어야 안심이 된다. (절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풍경은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고, 우리는 대답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게 된다.
가끔은, 의도적으로라도 동심으로 돌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답을 맞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틀릴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서.
모자처럼 보이는 그림에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떠올릴 수 있는 자유를, 아주 잠시라도 갖기 위해서다.
때가 너무 많이 낀 어른이 된 자신이 문득 낯설고 싫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마음속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을 어린 왕자를 조심스럽게 불러보고 싶다.
세상을 단순하게 보던 눈,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던 마음, 그리고 설명하지 않아도 웃을 수 있었던 감각을...
아마도 여행이란, 멀리 떠나는 일이 아니라 그런 자신을 다시 만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잠시 어른의 자리를 비우고, 마음속 어린 왕자에게 길을 내어주는 것.
그날의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산방산 풍경'은 조용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참고>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소설 『어린 왕자』의 주인공이 그림을 보여주며 질문을 던진다.
어른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모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그 안에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고 대답한다.
어른들은 겉모양을 인식의 근거로 삼지만 어린 왕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들 중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여깁니다. 편견과 때가 많이 낀 편견에 사로잡힌 어른과 달리 어린 왕자는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선의 차이가 존재의 깊이에 닿는 심도 있는 사유(思惟)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저자는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