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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숙 Dec 24. 2023

해마다 찾아오는 글 선물

<읽는 단어와 읽히는 단어 >


이틀 전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분은 어느 한 방송국의 간부로 퇴임 후 편안한 삶을 이어가던 중

내 일본어 학습자로 연을 맺었다. 그리고 여러 강좌가 있었던 그곳 글쓰기 교실에서 몇 년째 글을 쓰고 계셨다. 혹여 이사를 했을까 해서 주소 확인차 전화를 하셨던 모양이다.


도착한 책을 받아보니 그분 이외에 수업에 성실했던 또 한 분의 글도 나란히 올라 있었다.

이 분은 성함부터가 반듯한 사자성어와 비슷해 이름과 사람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출석 첫날부터 잊을 수 없는 분이었다.     


해마다 발행되는 글 속에서 난 그 두 분의 마음과 생각을 통째로 읽을 수 있었다. 한 분은 윤택한 가정에서, 또 한분은 어려운 가정에서 성장해 같은 노후 생활을 즐기고 계셨다.      


난 그분들의 유년시절을 꾹꾹 눌러쓰신 몇 장의 수필을 읽으면서, 이 글이 나에게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과정을 거쳤을까 두 번 세 번 읽고 또 읽으며 그분들의 마음속 깊이 들어가게 되었다.     


나름 유복한 삶이셨던 한 분의 이야기다.  그분자신이  어릴적 살았던 부유한  동네와는 달리,  맞은편 동네에 만지기만 해도 전염된다는 나병환자들이 기거해 있었고, 그 동네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다녔던 모양이다.


어느 날은 학교에서 돌아와 아버지께 “나 문둥병에 걸렸어요”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묻는 아버지 말에 “오늘 봄맞이 가자는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었는데 모든 아이들이 다 손을 만지며 돌았어요. 그들 중에는 문둥이촌 아이들도 있었어요. 그 후부터 내 손이 잘 펴지지 않아요.” 라며 엉엉 울었다고 한다.


지금은 어른이 된 그분의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오래전 내가 사는 아파트 건너편에도 아이들 학교를 보내면서 엄마들 사이에 이런 말들이 있었던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난 지금 글을 읽으며 그때의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리고 그분의 어린 시절이 얼마나 귀여운 모습이셨을까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아이들과 손을 만져 손이 펴지지 않는다'니 말이다.

   

또 하나는 최희준의 ‘하숙생’이란 노래가 한창 인기가 있을 무렵 대학에 다니는 삼촌이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라는 노래가사에 대한 에피소드였다.

그분은 삼촌이 이 구절을 부를 때마다 ‘정이’라는 식모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는 어린 여자애들이 식모살이로 이 집 저 집 전전했을 시기였기에 '정이라는 식모가 멍청하고 미련해서 집에 두지 말라'는 식으로 받아들였으니, 조만간 쫓겨나 나그네가 될 ‘정이’ 식모가 불쌍해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4학년 어린아이가 정과 미련이라는 두 단어 사이를 추론한 인과관계의 실수를 적고 계셨다. 참으로 재밌는 글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각자가 풀어놓는 보따리 속 이야기는 풀어도 풀어도 줄지 않는 화수분과 같다.


어린 시절 언니는 종로 외갓집에 가서 TV뉴스를 볼 때마다 ‘예산’이란 말이 자주 나와 우리 동네 예산이 참으로 유명한가 보라고 생각했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커서 생각하니 당시 눈이 왔던 연말이었기 때문에 예산편성이란 말을 들었을 거라는 것이었다. 순수한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좌: 톡으로 받은 카드, 우: 아파트 전경


아파트 '단지'란 말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골에서 된장단지, 간장단지는 들어봤어도 아파트 생활이 뭔지를 몰랐던 시절 아파트의 '단지'란 말은 TV하나 없었던 시골에서 자란 어린아이의 머릿속을 헝클어 놓았을게 분명한 단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분의 학습자 글에서는 항상 '성실'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당시도 성실한 학생이셨던 기억이다. 그런데 그분의 글에서 ‘개근거지’란 말이 등장했다. 이런 말이 있는지는 그분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성실한 학생으로 수업에 임하셨던 모양이다. 덕분에 한 해 개근상으로 양말선물을 받으셨다고 했다.      


그분은 개근상을 받고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잠시 과거를 회상하셨다. 두메산골에 사셨던 그분은 십리나 되는 길을 통학하셨고 홍수가 나면 어른 등에 업혀 강을 건너 학교에 다니셨으니 그분께 개근은 남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이 많았던 시절, 어릴 적 개근은 우등상 못지않게 높이 인정해 주는 상이 었다.      

그런 '성실'의 아이콘이 지금 '거지'라는 딱지가 붙은 것은 초등학교 자녀를 둔 엄마들이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등장한 신조어라는 것을 신문을 읽고 아셨던 모양이다.

개근하는 사람은 해외여행도 못 가는, 형편이 어려운 아이로 취급하는 것이 초등학생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걸 읽고 나서 그분은 문득 얼마 전 받은 개근상이 떠올라 묘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친구와의 산행을 핑계로 수업을 한번 빠지기로 결심하면서 순수했던 지나간 시절이 그립다는 말로 끝을 맺고 계셨다.    

  

‘정이와 미련', '개근거지’에서 보았듯이, "말(글)은, 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고, 듣고 해석하는 사람의 것이다"란 말이 떠올랐다. 같은 문자라도 이모티콘 하나로 두 가지 양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게 요즘 폰에 찍힌 문자를 보며 느끼는 것들이다. 나 역시 웃음표시가 번거로워 문자만 보냈다가 엄마 화가 났느냐는 아이의 질문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사람의 마음도 단어도 바뀌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세태이다.

 세상과 어울려 사는 만큼 세상의 변화를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배려의 마음이다.  서로 간의 오해의 싹을 만들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는 아쉬운 그리움의 조각들이다.

돌아갈 수도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힘든 세월의 아련한 추억일 뿐, 그리운 건 그대로의 멋이 있고 다가오는 새로움은 신선함 그대로의 멋으로 채워가야 할 것이다.


내게 학습자들과의 인연은 소중하다. ‘이치고 이치에(いちごいちえ·一期一会)’란 만남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 준 두 분의 학습자분들께 감사인사를 올린다. 내년에도 파이팅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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