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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바쓰J Feb 13. 2022

인(人)통사고 입원 환자들

아마도 가장 아프고 후유증이 심할 그런 사고  

<커버 이미지-몇년 전 팝아트 미술전에서 직접 찍은 그림 액자. Roy Lichtenstein(로이 리히텐슈타인)의 1965년 작품. 제목 ‘Sweet Dreams, Baby!’(좋은 꿈 꿔, 자기!)>

입으로 좋은말을 하면서 주먹으로 후려치는 모습을 그린 작가는 어떤 의미를 전하려 했을까?

잘 자라는 인사가 아니라 자던 사람도 깨우는 것 같은 장면이지만, 펀치를 때리며 영원히 가버리라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단다. 그러나 정작 작가 자신은, “내 작품들이 어떤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작품에 그런 메시지를 담길 원하지도 않으며, 나는 사회를 계몽하는 데에 관심도 그닥 없다.” 라고 말했다 한다.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卽不痛 不通卽痛)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
- 허준, ‘동의보감’ 중에서 -





보기엔 다 멀쩡한 사람들


내가 입원했던 병동에 외상 환자는 한 명도 없었다. 집중 치료실에서 삐-삐 소리를 내는 중증환자 감시장치를 달고 있는 청년조차 그랬다. 평화롭게 잠든 듯 누워있을 뿐 다친 곳으로 보이는 데가 전혀 없었다. 문틈 사이로 슬쩍 봐도 너무나 훤칠하고 잘생긴, 앳된 모습의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일주일째 링거 주사로 목숨을 이어가며 24시간 간병인이 돌보고 있으니,


"아이고 쯧쯧, 저이는 어쩌다 저렇게...?! 얼굴도 참 이쁜데…”

 

"아마... 자살기도를 했나 봐..."


그 방 앞을 지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유독 더 궁금해하고, 안타까워했다.


나도 그랬듯 그곳에는 ‘물리적인 힘'이나 '외부 충격'에 의한 상해로 입원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혹 보이는 외상이 있었다면 그건 어린 친구들의 곱고 가녀린 팔뚝에 마구 그어진 자해의 흔적들이었다.


정말 겉모습은 멀쩡하기만 한 이 사람들은 다들 왜 입원을 하게 됐을까?


하루하루 병원에서 지내는 날들이 더해지면서, 나는 그들의 사연을 듣게 됐다.





불통으로 부터 시작되는 인통사고


내 아이 같은 아들 딸들이 그곳에도 있었다.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에, 교복 대신 환자복을 입고 거기서 고립되어 있는 아이들을 보는 건 유독 더 안타깝고 가슴 아팠다.


난 누구에게도 먼저 캐묻듯 질문하거나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래도 오고 가며 서로 얼굴이 익어가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텄다. 그런 끝에 아이들은 똑같이 한 가지를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요."  


집이나 학교보다 병원 안에서 지내는 게 더 안전하게 느껴지고,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한 나이에 벌써 세상이 발 디딜 수 없을 만큼 두려운 곳이 되었다니… 이를 어쩐담!

겨우 땅을 뚫고 파릇하게 올라온 새싹들을 어떤 누군가가 마구 짓밟았구나, 싶었다.

그게 어른들이든 또래들이든 그 어린 영혼들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모두 똑같이 ‘유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아가씨 중 하나는 티 없이 밝고 명랑해 보이는 데다 얼굴도 예뻐서 유난히 눈길이 갔다. 나보다 어리다고 어른 티를 내면 꼰대 같아 보일까 봐, 나는 며칠이 지나도록 말수 없는 고독한 아줌마로 지내고 있었다.


어느 오후 그 아가씨는 환하게 웃으며 "과자 좀 드실래요?" 하고 먼저 다가왔다. 난 고맙다고 하곤, 이렇게 구김살 없는 사람이 어디가 아파서 병원에 왔는지 물어봐도 되냐고 말을 이었다.


꽤 오래전부터 가족 관계에 문제가 있어 결국 몇 년 전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어느 날부턴가 ‘죽을 계획’을 아주 구체적으로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단다. 그런 스스로가 너무 무서워서, 여기 큰 병원을 찾아와 ‘선생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애원하고는 제 발로 입원했단다.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좋아져서 주치의 선생님으로부터 퇴원 날짜를 가장 먼저 받았다. 그 후 그녀의 얼굴은 더욱 환해졌다. 퇴원하면 제일 먼저 친구들과 곱창에 맥주 한 잔 시원하게 마실 거라고 했다.


미소만으로 화사한 꽃이 되는 그런 예쁜 나이인데… 또 함부로 꽃을 꺾은 사람들에 의해 영영 시들어 버릴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껏 다시 스스로 꽃잎을 틔워냈으니, 참 다행이다.  



다른 몇몇 아가씨들과 청년들 역시 원인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우울 또는 불안과 싸우고 있었다.

학교나 회사에서의 스트레스, 힘든 연애와 이별, 가족들 사이의 다툼과 폭력 등 이유도 가지가지였다. 그러나 하나같이 그 시작은 똑같았다. 가깝기도 또 멀기도 한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다 깨졌다. 그로 인해 입은 상처를 견디다 결국 입원할 지경이 될 만큼 아프게 되었다.


어느새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이 커져버린 스트레스나 불안 초조한 마음을 달래는 방법으로, 자해가 습관이 된 친구들도 있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음식을 너무 많이 먹거나 아예 먹지 못 하는 섭식장애가 생기기도 했다.

이런 경우 대부분 응급실로 실려와 신체적 손상을 처치한 후 재활병동으로 보내진다고 했다. 그보다 더 심한 경우는 실제로 자살기도를 해서, 사고 현장에서 119 구급대에 의해 응급실로 오게 된 것이었다.



모범생 같은 이미지의 한 청년은 말을 하지 못했(않았)다. 모든 의료진들에게 의사소통을 종이에 적어서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도 손짓 고갯짓으로만 했다. 그래서 난 처음에 그가 농인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공중전화 옆을 지나는데 수화기를 들고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그를 보게 됐다. 그래서 난 그가 ‘선택적 함구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 얼굴 앞에서는 그의 입을 굳게 다물게 했을까?



나와 같은 중년들과 우리 엄마 또래 어머님들의 사연은 다들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켜켜이 쌓여 있었다.

남편 문제, 시댁문제, 아이들 문제... 여자이고 아내이고 며느리이고 엄마라서 아픈 줄도 모르고 버팀목처럼 지내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갱년기가 도화선이 되어 감당하기 힘든 우울이 덮쳐 쓰러졌다. 혹은 평생을 참고 또 참고 살다 화병이나 번아웃이 한순간에 터져 나온 경우도 있었다.


한 어머니는 집안 사업이 폭삭 망한 후로 마음의 병이 생겼다고 했다. 또 다른 어머니는 자기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왜 갑자기 가슴에 천불이 난 것 같은 상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양파 껍질 까듯 하나씩 펼쳐 내놓는 이야기를 쭉 들어보니, 가슴에 불뿐만 아니라 온 몸과 마음을 불사른 듯 살았다. 평생토록 여러 공장일을 하며 생계와 가정을 함께 꾸려야 했단다. 십수 년간 치매가 찾아온 시어머니를 모시다 그 직후 바통을 이어받은 듯 남편까지 치매진단을 받았다. 생업과 자녀 양육에 이어 쉴 틈 없이 두 치매 양반 돌봄까지 하셨던 거였다. 그러니 아프지 않은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싶었다.



아주 많이 연로한 어르신들이 치매 증상이 생기면 보통 요양병원으로 가는 경우가 많을 텐데... 할머니라 하기에 아직 너무 젊은 어머님들이 몇 분 계셨다. 나이에 비해 너무 빨리 알츠하이머나 치매를 앓게 되어서였다. 가족들이 매일 간식을 싸들고 찾아오고, 또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로 안부를 묻는 그런 다복한 가정의 어머님들이 화장실은커녕 자기 침대도 찾지 못하는 걸 볼 땐 참 인생은 알 수 없는 거구나 싶었다. 그런 단기 기억은 물론 오늘이 며칠이고 지금이 몇 년 도인지 처럼 전체적으로 시간 감각을 잃어버렸거나, 계속 환청으로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분들도 계셨다. '너 죽어라!'는 목소리가 계속 들리니 그냥 있는 것 자체로 불안한데, 간호사가 주는 약을 먹으면 그대로 죽을 것 같아 그렇게 약을 거부하기도 하는 거였다. 환청을 듣는 그 상황 자체가 힘들어서 갑자기 막 우시거나, 그러다 지쳐 '죽는 약 주세요'라고 쓴 쪽지를 간호사에게 내미시는 건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옆 병실에는, 평생 유치원을 운영하시다 은퇴하신 후 치매 증상이 나타나 당신 스스로 들어왔다고 하신 어머님이 계셨다. 복도에서 만난 내 손을 잡으시더니 말씀하셨다.


"아.. 이 모든 게 그냥 꿈이었으면 좋겠다..."  


참 사람의 인생이란 덧없구나 생각했다.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환자로서 함께 지내고 있으면서도, 그곳에서 난 마치 인간 생애 전체를 파노라마로 한눈에 관찰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뜻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인생과 세상을 배웠다.


참으로 모두의 인생은 각자가 다른 장르의 드라마였다. 그러나 그 드라마들 속 사건 사고는 한결같았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통하지 못하여 이리저리 부딪히고 다친, '인(人) 통사고'였다. 전에는 자세히 몰랐는데, 내가 보고 또 내가 경험한 것 중 어쩌면 가장 아프고 후유증이 심할 그런 사고가 아닐까 싶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인간관계란 늘 그랬다.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참 아팠다.'  





회복을 기다리며 


내가 잠을 더 자고 밥을 더 잘 먹게 되었을 무렵, 햇살 같은 미소의 아가씨는 병원 밖으로 나가 늦여름의 뜨거운 햇볕을 만났다. 자꾸 우시던 치매 어머니는 가족들이 집으로 모시고 갔다. 그리고 입원 첫날 나에게 따뜻한 손을 내민 전라도 어머니는 싹 다 나아서 퇴원하니 시원하다면서도, 그새 정이 들어 섭섭하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집으로 떠났다. 아, 누워만 있던 그 훤칠한 청년이 이제는 깨어나서 일반실로 옮겨 미음을 먹기 시작했고, 부축받아 화장실도 걸어서 가게 되었다. 지나다가 다른 환자들이 응원하듯 엄지를 치켜올리면, 화답하듯이 자기도 천천히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 어디에서든, 내가 만났던 새싹들이 다시 파릇파릇하게 자라고 예쁜 꽃들은 더욱 활짝 피어나고 있기를 바라본다. 휘청했던 그 나무들도 다시금 튼튼하게 뿌리를 다지고 굳게 서기를, 그래서 남은 나날들을 더 잘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지금 내가 그래야 하는 것처럼.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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