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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웨지감자 Dec 28. 2022

좆된 자들의 모임

우리는 교류하고 싶다

격주 화요일 저녁 11시마다 나는 좆된 이들과 만난다. 모임 이름은 일명 <좆된 자들의 모임>. 럭셔리하게 줄여서 <죠뗌므>라고 부른다.

이 고져스한 모임은 다섯 명의 대학 과동기들이 모여 결성했는데, 왜 우리가 좆됐냐 하면, 이들은 모두 대학원을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 명의 죠뗌므 회원들은 학부 전공은 같지만 대학원 전공은 서로 다르다. 그러면서도 학부 전공과는 어떻게든 상관있는 전공으로 진학했다는 게 특이사항이다.


대학원에 다니면 연구실 분야에, 그리고 개인연구 관련 공부만 하기 급급해서 다른 연구실에서 어떤 걸 하는지 알기 어려워진다. 좁고 깊게 공부하는 게 대학원 공부라지만. 내 연구를 누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과 다른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게 대학원생 마음이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결성한 모임이 죠뗌므다.


그러니 자조적인 표현으로 스스로를 좆됐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 누구보다 공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죠뗌므는 기본적으로 서로의 전공을 공유하고, 시야를 넓혀 새로운 영감을 주기 위해서. 연구에서 마주하는 문제점을 새로운 시각에서 풀고자 만들어졌다.


모임은 대학원생이 그나마 숨 돌릴 시간이 있는 심야에 줌(zoom)을 통해 비대면으로 진행되었다. 웃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이나 업무가 끝나지 않아 회원 중 반은 연구실에서 모임에 참석하곤 한다는 것이다. 카메라를 켠 친구의 뒷 배경이 누가 봐도 연구실이면 웃기고 짠한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곤 했다.






매 모임마다 두 명이 자기 전공과 관련된 이야기를 준비한다. 서로 바쁜 걸 알기 때문에 이 모임을 만들 때부터 <열심히 준비하면 호통치기>가 규칙이었다. 그래서 모 친구는 그림판으로 그림 그려서 발표하고, 나는 온갖 밈으로 도배해서 보노보노급 피피티를 만들곤 했다.

죠뗌므 모임의 스타트를 끊었던 내 보노보노 피피티가 너무 반응이 좋아서 너무 신나 버린 나머지 이제는 내용보다는 어떻게 친구들을 웃길지에 더 골몰하게 되는 주객전도 현상도 일어나 버렸다.


실제로 내가 죠뗌므에서 만들었던 피피티



죠뗌므는 형식 제한도, 내용 제한도 없다. 진행 중인 연구, 세미나 논문 리뷰, 기본적인 분야 지식 등 발표 내용도 정하기 나름이다. 시간은 한 사람당 20분 발표, 10분 질문이 원칙이었지만 두 명이 발표를 끝내고 나면 두 시간은 훌쩍 지나있곤 했다. 다른 회원들에게는 생소한 내용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예상보다 시간을 많이 쓰는 데 이유가 있었다.


가끔 친구들은 중요한 발표가 있을 때 리허설 삼아서 모임을 활용하기도 했다. 발표해야 하니 어떤 피드백도 환영한다며 말이다.

가끔은 한 분야의 지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의 타개점을 다른 회원의 코멘트에서 찾을 수도 있었다. 자연스레 협업하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같은 문제를 두고도 서로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는 때도 있었는데 그런 순간에는 정말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이렇게 서로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니. 각자 연구를 진행해서 종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정말 생각하면 짜릿한 것이다.






어젯자 모임에서는 내 발표 차례가 돌아왔는데 이전에 연구실에서 공부한 세미나 논문을 발표했다. 나에게도 너무나 벅찼던 세미나였지만 한번 이런 분야도 찍먹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바람에서 소개하려고 했다. 하지만 모임 회원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내용을 발표하려니 걱정을 참 많이 했는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일에 시달리고 온 낡고 지친 대학원생들은 쏟아지는 수식에 머리를 부여잡고는 중간부터 이해를 포기하더니 일부는 자기 전공에 감사한다는 말을 남기기까지 했다. (어흐흑)

총평은 <새롭고 신기하지만 어렵다>였다. 다음 발표에는 쉬운 주제로 차근차근 준비할 것을 다짐했다.






죠뗌므는 기본적으로 학술적 모임이지만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모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친목 모임도 겸하게 되었다. 연구실에서 힘들었던 일들, 연구가 잘 안된다는 푸념, 요즈음 하는 취미생활과 건강 걱정들, 연애 상담.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고 다독인다. 대학원 안에서만 할 수 있는 고민들과 대학원생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말들을 건넨다.


다들 치열하게 사는구나. 다들 저마다 다른 이유로 고민하는구나. 다들 건강이 안 좋구나(?). 서로에 대한 이런저런 걸 알게 된다.

어제도 모임원들 중 한 명은 늦게까지 실험을 하면서 중요한 발표 준비를 하느라, 두 명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고충을 겪고 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난 후 카톡에는 서로 힘내자며 토닥이는 말 일색이었다.



나는 이 열정적이고 따뜻한 모임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밤늦게까지 앎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이 사람들의 미래에 축복을 건넨다.

앞으로는 꽃길만 밟기를. 연구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고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기를. 마음 담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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