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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웨지감자 Dec 29. 2022

세미나 공포증

질문 안 받는다

보통 대학원 연구실이라면 정기적으로 최신 논문을 리뷰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를 우리 연구실에서는 세미나라고 하는데, 어떻게 부르는지는 경험상 연구실마다 달랐던 것 같다. 보통 연구실 학생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1시간 내외로 발표하고 질문받는 시간을 가진다.


세미나는 중요한 활동이다. 흐름이 확확 바뀌고 눈 깜짝할 사이 새로운 기술이 나오는 학계에서 연구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늘 최신 논문을 공부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니까.


하지만 나는 이 세미나 시간이 정말 너무너무너무 싫다.

나는 내 발표순서가 오면 과민성 대장 증후군 스위치가 눌려서 입맛도 없고 속도 아프고 목소리도 떨린다. 세미나 공포증이다.

세미나 발표 직전에는 항상 빌었다. "제발 내가 아는 곳에서만 질문이 나오기를."






나의 세미나 공포증은 인턴 시절 이전부터 이미 예견되어있던 것이었다.

왜냐, 나는 발표 공포증이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관심이 집중되는 발표 시간을 유난히 싫어했던 나는 청중 앞에 서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배가 아프고 목소리가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리고 눈앞이 뿌옇고 그랬다.

내 실수가 만천하에 까발려질 판이 깔려있다는 게(?) 부담스러워 딱 혀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곤 했다.






학부연구생 시절 나는 첫 세미나를 대차게 말아먹었다. 아주아주 대차게.


때는 학부 4학년 시절이었다. 연구실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학부연구생이었던 나를 선배들이 세미나 발표 순번에 넣었다.


교수님과 대학원생 선배님들 앞에서 발표해야 한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한 나는 사수님께 논문 검토까지 받았다. 사수님은 논문을 쓱 훑어보시더니 이 정도면 연구실 주제와도 관련이 있고 교수님께서 흥미 있는 주제니 괜찮을 거라고 하셨다.


그러나...

내가 고른 세미나 논문은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읽어도 읽어도 어떻게 분석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멘붕에 빠졌다. 읽다 보니 이건 우리 분야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검색해 보니 (그 당시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분석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뿔싸. 나는 method에 있었던 그 많던 수식들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세미나 논문을 골라버린 것이다.


결국 나는 연구를 깊게 이해하지 못한 채 발표를 시작했고, 그 자리에 있던 단 한 명의 사람도 이해시키지 못했다. 교수님조차도.

세미나는 어찌어찌 훈훈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끝났지만 나는 거의 울 뻔했다.






보통 첫 세미나 발표는 실패하는 걸까?

연구 분야를 거의 드리프트 하다시피 바꾸어 진학한 대학원에서도 첫 세미나는 제대로 이해시키지 못한 채 발표가 끝났다. 그날의 기억도 떠올리기 싫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


세미나 발표가 어려운 이유는 논문에서 어떤 브분을 유심히 봐야 하는지를, 갓 분야에 발을 들인 학생은 파악하지 못하는 점에 있는 것 같다.

대학원 초기의 나는 항상 가장 중요한 조건을 간과하고 논문을 읽기 일쑤였고, 꼼꼼하게 실험 설계를 따지지 못했다.

딴엔 공부했다고 했는데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부분과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중요한 부분이 많이 다르곤 했다.






여러 번의 세미나 발표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서 나의 세미나 공포증은 많이 완화되었다. 세미나를 준비하며 교수님이, 그리고 연구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조건이 무엇인지 훈련할 수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세미나 발표 때는 제발 질문하지 말아 달라고 마음속으로 빌곤 하지만, 보다 차분하게 발표를 진행하고 질문에 답변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것을 배울 때는 쪽팔리는 과정을 견뎌야 한다고 누가 그랬던가.

나에게는 그게 세미나 발표였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고 나서 나는 보다 교수님의 관점(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으로 논문을 바라볼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연구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포착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조금 더 노련하게 세미나 발표를 진행하는 스스로를 돌아보면 기특한 마음이 든다. 앞으로도 힘들어도 계속 시도해야겠다. 언젠가는 멋있고 깔끔하게 세미나를 진행할 날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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