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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웨지감자 Feb 03. 2023

무조건 쓰는 버릇

생각의 물질화

연구실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생긴 버릇이 있다.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쓰는 것. 반드시 자필이어야 한다. 인턴을 시작하면서부터 쓰기 시작했고, 다 쓴 공책들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으니 이제는 내 자취방 책꽂이 한 칸을 공책들이 다 차지하고 있다.


오래된 공책들을 다시 펼쳐보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뭔지 모를 애틋한 마음이 피어오른다. 저기에 내 지난날의 열정이, 힘들었던 기억들이 잠들어 있다. 이사할 때 너무 무거워서 버릴까 하는 충동이 일었지만 차마 버리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처음 쓰기를 시작한 건 사수 선배한테서 설명을 듣다가 "이거 다 기억할 수 있어?"라는 질문을 받았던 때부터였다. 인턴생활을 제대로 하는 건 처음이었던 나는 선배가 말씀하시는 걸 적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허둥지둥 손에 잡히는 아무 공책이나 가져와서 선배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기기와 실험을 설명해 주는 걸 받아 적었다.

처음 적은 연구노트는 내가 다시 봐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선배의 설명은 가끔 두서가 없었고, 나는 필기하는 요령이 없었다. 가르침 받은 대로 혼자서 하다가 초장부터 막혀 주눅 든 표정으로 쭈뼛쭈뼛 선배를 찾아가기 일쑤였다. 시시콜콜한 질문을 다 받아주기엔 너무 바빴던 선배를 보며 나는 어떻게든 혼자 해내보려고 속기사가 된 것 마냥 뭐든 다 종이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개인 연구를 시작하고 책임이 생기자 적는 일은 더 중요해졌다. 번개라도 맞은 듯 빠르게 지나가는 아이디어는 잠깐 한눈팔면 공중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한 번 흩어진 생각은 아무리 용을 써도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늘 펜과 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떠오르는 생각이란 생각은 무조건 적고 봤다. 적을 용지가 없으면 핸드폰에라도 적었다.


아이디어는 갑자기 찾아오곤 한다. 책을 읽다가, 길을 걷다가, 강의를 듣다가 반짝 스쳐 지나간다. 이 깨달음의 순간을 나는 절대로 그냥 지나가게 두고 싶지 않았다. 결국 허무맹랑한 생각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은 언젠간 찾아올 중요한 생각을 붙잡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연구하다가 길을 잃어도 나는 노트를 펼친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일들을 쭉 적어본다. 어떠한 가설을 설정해서 어떤 결론을 도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는지. 그것을 위해 어떤 방법으로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지금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쭉 적은 연구 지도 위에서 나는 생각한다. 지금 나는 이 단계 중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이 방법이 연구 목적에 맞는 방법인가? 목적을 잃고 어디로 표류해버리지는 않았는가?


연구를 진행하다 보면 자꾸 해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 하다 보면 궁금해지는 질문들과 더 깊게 파봐야 할 것 같은 지점들. 이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겠지만 주기적으로 숲을 보려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연구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길로 새 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연구가 막힐 때 자필로 노트에 쭉 쓰고 자문자답하면서 자주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나는 습관적으로 무엇이든 적고 기록하려고 노력한다.

덜렁거리고 꼼꼼하지 못한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오늘의 일정과 해야 하는 일을 쭉 쓴다든지. 일을 하다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면 일기를 써버린다든지. (보통 투덜거림과 스스로를 다독이는 말들이 많다.)


노트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만족감이 찌르르 올라온다. 내 생각이 손에 잡히는 물질로 남았다. 공책의 두께가 나의 나름대로는 치열했던 시간들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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