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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웨지감자 Feb 20. 2023

덕업일치

무엇을 업으로 삼아야 할까

나의 첫 장래희망은 화가였다.

초등학생 때 나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재능이 있다는 어른들의 평가도 꽤 많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재능이 있다"라는 말에 화가의 꿈을 포기했다.

어느 날 작은아버지는 방으로 나를 데려가시더니 사과를 하나 그려 보라고 하셨다. 나는 가까운 친척에게 내 그림을 평가받는다는 사실에 잔뜩 겁을 먹고 최선을 다해 사과를 그렸다. 자신감이 없어서 너무 작게 그려버린, 긴장해서 힘이 잔뜩 들어간 그림은 내 마음에도 들지 않았다. 작은아버지는 "이 정도면 재능이 있다. 학원을 다녀보면 되겠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 아쉬운 결과물이 평가당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두 번째 장래희망은 피아니스트였다.

나는 피아노 연주하는 것을 정말 좋아했고 또래보다 잘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피아니스트의 꿈도 초등학교 3학년에 버렸다.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다. 다니던 동네 학원에 나와 동갑이면서 항상 나보다 한 발자국 진도를 앞서가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학원에서 두 번째로 피아노를 잘 치는 애>였다. 나는 첫 번째로 잘 치는 아이가 되고 싶어서 발버둥 쳤지만 쉽지 않았다. 그 애가 나는 아직 엄두도 못 내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ost 인생의 회전목마를 현란하게 치는 것을 보면서 나는 피아노는 취미로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작은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도 1등을 못하는데 앞으로 피아노로 밥 벌어먹고 살 길이 막막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피아노는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계속 쳤다. 피아노 학원 선생님께서는 예고 입시를 준비해도 될 정도라고 하셨지만 나는 무대공포증이 있었다. 예고 준비를 해도 되겠다는 말에는 내심 우쭐했지만 역시 피아노는 내 길이 아니었다.


세 번째 장래희망은 작가였다.

이건 내가 학교에서 알아주는 책벌레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나는 특히 소설을 좋아했다.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서 독자들을 감명시키고 싶었다. 책을 써서 나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도 막연히 한 것 같다. 중학교 시절에 나는 꽤 오랫동안 나는 작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읽기는 잘했지만 글은 한 자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림과 마찬가지로 힘이 너무 들어간 탓에 내가 봐도 참 글이 어색하고 자연스럽게 읽히지 않았다. 때마침 글을 꽤 유머러스하게 썼던 동생의 일기를 보고는 "아, 이게 글 쓰는 재능이구나" 깨닫곤 깊은 고민 끝에 결국 작가의 길을 포기했다.






내 마지막 장래희망은 작은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

기억나지도 않은 때부터 나는 그냥 궁금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호기심은 자연스럽게 내 꿈이 되었다. 나는 마음속에서 작게 싹트는 의문을 평생에 걸쳐 탐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 분야를 집착하면서 파보려고 하는 약간 오타쿠적인 성향이 있는 나는 연구가 적성에 잘 맞았다 (지금까지는).


대학원 초창기에 논문을 읽고 공부할 때는 이런 의문까지 들었다.

-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것 같아. 근데 돈도 줘. 왜지? 이렇게 재밌으면서 돈 받는 거 말이 되는 걸까? 일이 재밌어도 괜찮은 걸까?


논문 펼치고 공부하고 세미나 듣고 하는 게 다 새롭고 재밌었다.

물론 이 행복한 고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돈을 주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는 깨달음과 함께 불식되었다. 연차가 쌓여갈수록 점점 무거워지는 책임감과 얄짤없이 다가오는 데드라인, 쉽게 풀리지 않는 연구는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연구가 좋다. 이대로 이 생각의 바다에 빠져서 영감들을 주워 모으며 둥실둥실 떠다니고 싶다.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로 매 순간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공부를 바라는 만큼 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인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왜 어떤 꿈은 일찌감치 포기해 버리고 어떤 꿈은 끌어안고 갈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게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딜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나는 주로 예술을 업으로 삼고 싶어 했고, 일찍이 재능의 차이를 깨달으며 포기해 왔다는 걸 깨달았다. 일을 하면서 행복한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막상 일을 시작했을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압박과 스트레스를 견딜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연구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연구자가 마주하게 될 스트레스는 내가 감당가능한 것이었다. 연구 결과가 부진하면 그것은 내가 오기가 생기게 만들었고, 옆 동료가 좋은 성과를 내면 무작정 시샘하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본받게 되는 선순환이 그려졌다.


그래서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

대학원이라는 한 고비를 넘으면 또 다른 험난한 길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연구직에 평생 몸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일을 하는 나는 행복하다. 이 공부를 하는 나는 행복하다. 다른 일을 하게 되더라도 지금 받는 이 덕업일치의 순간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이 경험이 앞으로의 미래에 어떤 방향으로든 큰 영향을 줄 거라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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