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권 독서

[춤추는 최승희] - 정병호

by 조윤효

최근 본 책에서 '세계를 휘어잡은 조선여자 최승희'라는 문구 때문에 구입해 읽은 책이다. 전 세계적으로 한류가 대세인 요즘, 이미 1930년 후반부에 동양미로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린 그녀의 대담성이 경이롭다.



일제 강점기였고 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 어떤 힘으로 그녀는 미국 10회, 프랑스 20회, 벨기에 9회, 네덜란드 10회, 남독일 2회, 중남미 61회 약 150회 이상의 공연을 해냈을까? 파리 휘가로 지에서 그녀의 공연에 대한 평이 다음과 같다. '그 여자는 조각적인 선과 경이적인 손놀림의 표현과 코믹함, 그리고 위협적인 가면으로 매우 다양한 감정을 나타낸다. 그 여자는 동양의 환상을 보여 준다.'



170의 신장과 뚜렷한 이목구비와 더불어 유난히 긴 손은 무대에서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 주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그녀의 독무 춤은 개성이 강했던 것 같다. 2분 길이의 홀로 추는 무대를 잘 돋보이게 하기 위해 무대 조명을 적극 도입했다. 또한 실제 음악 연주에 맞춰 춤을 추었으니 생생한 무대를 더욱 돋보이게 했을 것이다. 당시 실험 정신과 함께 신들린 듯한 춤은 관객들의 혼을 빼앗았다고 한다. 보통 25~26 가지 주제로 춤을 추고, 1분 안에 옷을 갈아 입고 다음 춤을 추며 등장했다고 하니 춤에 대한 열정과 그것을 보여 주기 위한 혼신의 힘이 돋보인다.



숙명 여자 학교를 다녔던 그녀에게 오빠 최승일이 일본의 공연단 이시이 바꾸 연구소가 준비한 춤을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한 동생의 재능을 알아봤고 이를 꽃피우게 하기 위해 이시이 바꾸에게 문화생으로 받아 주길 개인적으로 부탁했었다고 한다. 오빠의 이끌림으로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고 해야 할 일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춤은 기생이나 무당이 추는 춤으로 인식이 천한 쪽에 가까웠기에 양반가인 그녀 집에서는 당연히 반대를 한다. 결국 아버지만의 동의로 일본 이시이 바꾸 연구소의 문화 생으로 3년을 공부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였고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환경적 요인은 최승희의 춤에 대한 열정을 잠재우지 못했다. 3년 문화생으로 있다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 우리 춤을 배우고 춤연구소와 공연을 기획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회의 벽들에 그녀는 힘든 시간을 보낸다. 다행히 이때 남편 안막을 만나 결혼을 하고 이를 통해 그녀의 정신적인 안정이 다음 춤을 위한 힘이 되게 해 준 것 같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안막은 자신의 글 쓰는 일을 접고 세계적인 무희가 될 아내 최승희의 매니저 역할을 자처한다. 최승희의 인생에서 오빠 최승일과 남편 안막이 없었더라면 무용계의 한 획을 그을 그녀의 존재감은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보이지 않는 보수 장벽에서 허덕이는 그녀는 남편과 다시 이시이 바꾸 연구소로 들어 가 제대로 된 춤 공연을 시작한다. 이때, 일본 색의 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유의 춤들도 공연하는데 특이하게 일본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녀 춤의 팬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춤은 반일적 작품을 공연하면서도 용케 총독부 경무국의 사건 검열이나 임검 경관의 제지를 받지 않은 것은 언어적 구체성을 갖지 않은 무용의 추상성 때문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간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녀의 티켓을 구하기 위해 공연장 주의로 사람들이 세 바퀴를 만들 정도였다고 하다. 그녀가 첫 한류 스타인 샘이다. 당시 일본 식민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광고에 출연하고 영화를 찍는 등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스타의 삶을 누렸다.



조용하면서 아내가 잘 클 수 있도록 해 준 남편 안막의 외조 또한 한몫을 했다. 공연 전 그녀의 사진을 5~10매 단위로 묶어 판매를 하는 전략이나 세계무대에서 한 공연 구성을 크게 4회로 나누어 관객은 횟수로 나누어 티켓을 구매할 수 있는 자율권을 부여한 것은 안막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안막 덕분에 최승희의 사진이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남아 있다. 책을 통해 그녀의 춤사위를 엿볼 수 있어 읽는 동안 선물처럼 쏟아지는 아름다운 사진 감상도 재미있었다. 다행히 인터넷으로 영상을 찾아보니 그녀의 춤을 볼 수 있었지만 책에서 주는 감흥보다는 떨어진다.



그녀의 월북은 남편 안막의 권유로 진행되었지만 결국 그녀의 말처럼 새장 속에 갇힌 새가 되어 비참하게 숙청되어 북에서 그녀의 화려한 삶은 막을 내린다. 독립 후 그녀에 대한 친일 행위에 대한 비판이 그녀로 하여금 북으로 가게 한 제일 큰 이유였을 것이다. '최승희는 예술과 정치는 다르다는 분리론자였고, 그 행동은 예술에는 정치를 이용할 수 있지만 정치를 위하여 예술을 하는 것은 꺼려했다.'라는 대목으로 그녀의 정치와 예술의 경계를 보여 준다. 일본에서 춤 공부를 했고 당시 일본 밖 중국에서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위해 위문 형식이 추가되어야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기에 해방 후 그녀의 평은 친일 무용가였을 것이다.



또한, '최승희는 서양의 발레에 도전하려고 중국 무용의 다양한 형과 일본 무용의 다양한 색, 그리고 조선 무용의 다양한 선을 활용한 동양 발레를 창조해야 한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라는 말에서 보듯 정치색보다는 자신의 예술적 욕심에 더 큰 가치를 둔 진정한 예술가였다. 그래서 북에서 초반의 파격적인 김일성의 대우를 받았지만, 그녀 만의 예술적 고집이 공산당이나 김일성을 찬양한 작품을 만들어 내지 않았기에 남편에 이어 결국 숙청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북한에서 숙청 직전에 <조선 무용 동작과 그 기법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성>이라는 그녀의 논문은 세계적 춤꿈이자 동양 무용의 정립과 세계화를 부르짖고 실천한 공연 예술가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녀의 춤에 대한 평은 압도적 찬양이라면 북한에서의 고립된 환경은 그녀의 자부심이 그녀를 해치는 칼이 된듯하다. 그녀는 음악을 시각화하려 노력했고, 단조로운 조선의 악기를 개조하여 오케스트라 형식의 음악을 만들고자 했던 개척자였다. 그녀의 춤에 대한 평은 내면적 깊이 보다는 움직임의 다이내믹한 자유로운 춤이었다는 평이 주를 이룬다.



그녀가 세계 공연을 위해 3년간 일정 동안 딸 안성희와 떨어져 지낼 만큼 그녀의 예술 세계는 대담했다. 세계 2차 대전 시발전 속에서도 자신만의 예술 색깔을 알리기 위해 대담한 행보를 포기하지 않은 정신은 그 누구도 쉽게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다. 딸 또한 어머니의 끼를 받아 베를린 국제 무용 축전에서 <장검무>로 일등상을 받았다고 하니 그녀의 북한 삶에서 유일한 마음의 위안이 되었을 것 같다.



그녀의 책을 통해 우리가 보는 역사의 굵은 가지가 아니라 그 곁에 일상을 살아간 소시민의 잔가지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혼신을 다하는 삶이 결국은 아름답다. 흑백으로 된 그녀의 도약하는 춤 사진을 수십 년 동안 소장했던 사람들의 마음 또한 감사하다. 단, 한번 그녀의 공연을 봤을 뿐인데도 그녀의 춤을 기억하고 그리워하게 만든 힘이 대단하다. 그녀의 삶을 연구하고 재 조명하기 위해 저자의 7년간의 노력 또한 아름답다. 꽃처럼 화사하게 피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저버린 그녀의 삶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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