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권 독서

[은수저] - 나카 간스케

by 조윤효

읽지 않아도 익숙한 책들이 있다. 제목이 너무 익숙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읽지 않게 될 수도 있고, 익숙해서 꼭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게도 한다. <은수저>라는 책은 내게 전자의 경우다. 2018년에 읽었던 <슬로 리딩>이라는 책에서 느리게 읽기로 사용된 책이다. 일본의 한 시골 중학교에서 하시모토 선생이 이 책을 가지고 3년 동안 아이들을 지도했다. 전쟁 이후라 교과목을 나라에서 정해준 규정대로 가 아니라 교사의 역량으로 가르칠 수 있는 자율권을 준 시대적 배경도 있다. 하시모토 선생은 <은수저>라는 책을 한 장 한 장 다양한 방법으로 책을 읽어 가게 한다. 앉아서만 하는 독서가 아니라 모르는 단어 찾기는 기본이요 이 책에 나온 활동 체험하기, 같은 음식 먹어보기 등 역동적 책 읽기도 함께 병행한 것이다. 그 과정을 밟은 아이들이 명문 도쿄대학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하게 되어 그의 독서법과 그가 사용한 <은수저>가 덩달아 스테디셀러가 된 것이다.



이 책은 마치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종이에 물이 스며들듯이 올라오게 하는 힘이 있다. 책을 읽어가면서 우리와 비슷한 놀이 정서를 통해 그렇게도 기억나지 않던 유년기의 기억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왜 이 책이 아이들의 뇌를 바꾸고 공부하는 재미를 주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첫째, 어휘의 풍부함 때문일 것이다. 평소 만나지 않았던 어휘들이 서로 어깨동무하듯이 하늘거리며 지속적으로 춤을 춘다. 둘째, 어린아이의 감성을 어린아이의 눈으로 써 내려간 작가의 힘 때문이다. 산문보다는 시 쓰기를 원했던 저자는 생활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첫 수필로 '은수저'를 썼다. 어린 시절 간직했던 은수저를 통해 27살 저자의 자서전 적 글이 태어난 것이다. 100년도 넘은 책이지만 저자의 순수한 어린 감정을 어른의 눈으로 재단하는 과정 없이 아이 눈 그대로 드러낸 기법 때문에 학생들에게 더욱 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조카 주영이가 남동생 정빈이게 한글을 가르친 것처럼 서로 가까운 세계관을 가진 이들끼리 더 쉽게 잘 전달시킬 수 있는 효과 때문은 아닐까?



당시 아들과 슬로 리딩을 따라 하기 위해 박완서 선생님의 자서전 수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밤마다 같이 읽었었다. 전쟁 전후의 유년 시절 이야기라 낯선 어휘가 많아 사전을 찾아가며 읽기 시작하니 당연히 아들 녀석의 거부감이 심했었다. 결국, 사전 찾기를 포기하고 그냥 몇 페이지씩 매일 읽다가 어느 순간 서재에 홀로 뒹굴게 했다. 늘 마음 한쪽에 읽지 못한 미련 때문에 몇 달 뒤 결국 다 완독 했지만 하시모토 선생처럼 결과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 것 같다. 삶의 진리다. 누구나 시작은 한다. 하지만 인내를 가지고 꾸준하게 해내는 힘이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3년 동안 까까머리 남 중생들을 데리고 한 권의 책으로 끌고 나갈 수 있는 힘이 바로 교육인 것이다.



유난히 약해 5살까지 이모의 등에서 세상을 본 간스케 이야기이다. 너무 착해 자신의 재산을 남들에게 주거나 빌려줘 버린 이모가 남편을 잃고 간스케 집에서 함께 산다. 자신의 아들이 죽고 난 후 태어난 간스케 이를 환생한 자신의 아들로 믿고 지극정성을 다하는 그녀의 모성애가 느껴졌다. 밤마다 들려주는 일본 신화와 전통 이야기 그리고 옛시조를 외우게 도와준 그녀의 정서가 저자의 어린 시절 보물 창고가 된 것 같다. 낯가림이 심해 늘 이모의 등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그에게 이사 후 옆집 아이 오쿠니와 첫 친구가 된다. 자신의 집 사이의 작은 정원 겸 텃밭은 아이들의 훌륭한 놀이터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땅따먹기 놀이가 기억난다. 땅에 큰 사각형을 그어 두고 각각 4개의 코너에 자신의 한 뼘 손으로 반원을 그어 자신의 땅 영역을 긋는다. 손의 크기에 대해 그 누구도 불공평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작은 돌을 주어 자신의 땅 안에서 밖으로 돌을 튕겨 다시 밖에서 안으로 그 돌을 넣으면 된다. 욕심을 너무 부려 멀리 나간 돌이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하면 땅을 넓힐 수가 없다. 결국, 제한된 큰 사각형 안에서 누가 더 많이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가가 중요하다. 어린 시절 시골아이들의 놀잇감은 자연이다.



8살이 되어 학교를 가야 하는 시기가 되자 오쿠니와 학교에 다니지 않기 위해 기를 쓰는 장면도 재미있다. 결국, 학교 생활에 익숙해지는데 교실 짝지와 벌어지는 소소한 싸움들도 나의 유년과 너무도 유사하다. 책상 가운데 줄을 그어 두고 넘어오지 못하게 한 것이나 석판(당시 우리는 노트)에 못난 그림들을 그리고 짝지 이름 써두기 등등의..... 다툼으로 선생님께 혼나는 장면들은 유년기 교실 속 나를 불러 낸다.



간스케 집에서 100 미터 정도 떨어진 과자를 파는 두 노부인의 과자점 이야기는 흥미롭다. '무궁화 산울타리를 빙 둘러싼 공터에 학을 대여섯 마리 기르며 옛날 과자를 파는 영감 할매 부부'라는 대목에서 학을 키울 수 있다는 게 독특하게 다가왔다. 어린 시절 우리 집과 과자가게의 거리는 500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가끔 용돈이 생겨 과자가 먹고 싶어도 그 길이가 직선이 아니라 약간 돌아가는 길이라 무서워 사러 갈 용기를 내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까만 기와지붕 뒤로 집 높이보다 훨씬 높은 나무가 뒤에서 떡 버티고 있어 무서워 보였던 기억이 난다. 오래된 물건 위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보니 제법 괜찮은 물건의 진가를 느끼듯이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어린 시절 기억들과 비교하는 유년의 나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는 책이다.



입에 넣고 뽀득뽀득 소리를 내는 꽈리 이야기는 또 다른 추억을 불러 내주었다. 언니 오빠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따라갔다가 학교 운동장에 교장 선생님이 의자에 앉아 있고, 언니 오빠는 선샘님의 흰 머리카락을 뽑았다. 나는 학교 운동장 옆의 작은 수로 같은 곳에 입에 넣은 꽈리를 물가에 놓고 떠내려 가는 꽈리를 따라가 다시 줍고 다시 내려놓던 장면이 떠오른다.



옆집 오쿠니가 시골에 부모와 휴양을 위해 다녀왔더니 이사 가고 없다. 대신 얼굴이 하얀 케이라는 동갑내기 여자아이가 옆집으로 이사 오고 친해진다. 나름 친하게 지내지만 늘 티격태격 하는 장면은 옆집에 살던 나와 동갑내기 윤근이를 떠오르게 한다. 집 근처 부대의 군인들 지프차에 왼쪽 팔꿈치 아래부터 한 손이 없는 옆집 윤근이. 철없던 나는 놀이가 내 맘대로 되지 않으면 그의 약점을 놀렸던 기억 때문에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간스케 형은 동생을 데리고 낚시를 다닌다. 간스케는 낚시하는 걸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이 형이 무서워 따라다닌다. 이 장면을 읽으며 어린 시절 섬진강에 고기잡이에 한창 빠진 오빠들을 따라다닌 기억이 돌아왔다. 맑은 섬진강 물에 유리병처럼 생긴 통 안에 떡밥을 발라 두면 신기하게 고기들이 떡밥을 먹기 위해 그 안으로 들어간다. 들어간 고기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어린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잡은 고기를 들고 세상을 다 가진듯한 느낌을 가졌었다. '나는 항상 그런 어린이 다운 경탄을 품고 내 주위를 바라보고 싶었다. 사람들은 많은 것에 익숙해지면서 그 야말로 흔히 보아온 것이라는 듯 무심코 지나쳐 버리지만, 생각해 보면 해마다 봄이면 눈뜨는 새싹은 해가 갈수록 다시금 새롭게 우리를 놀라게 할 일이 리라.!' 저자의 글 중 가장 인상에 남는 글귀다.



노스님에게 차를 갖다 드린 인연으로 그로부터 받은 그림 한 장을 생각해 본다. 잎 한 장, 덩굴 한줄기, 수세미 열매 하나가 그려진 그림 위에 '세상을 하찮은 수세미 보듯 우습게 봐도 일 없이 빈 둥 빈 둥 매달려 있기만 해서는 살아갈 수 없네'라는 글귀를 써준 노스님의 생각을 읽어 본다. 세상을 하찮게 보고 등지고 살아가는 고행 스님이지만 할 일 없이 빈 둥 거릴 수 있는 자신의 삶을 경계하고 픈 마음이 들어간 것 같다. 그는 옛날의 석불처럼 숙연히 결가 부좌를 틀고 수명을 다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원하는 삶의 결과를 얻고 떠나신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책을 읽으면서 선명한 어린아이의 세계 묘사가 먼지 덮인 나의 유년기를 떠오르게 해 주어 신기했다. 기억은 단지 불러내는 작은 손짓으로 쉽게 다시 떠오를 수 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책의 서평에서 '어린아이가 체험한 어린아이만의 세계다'라는 말이 이해가 간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한 때 어린아이였고, 아니면 어린아이이다. 삶을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힘은 삶을 경탄할 힘을 갖게 해 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경이롭고 보고 수시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만들어 낼 때 삶의 향기는 진해진다. 그렇게 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웃음을 피워내야 삶이 향기로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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