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었다. 책을 읽으며 오랜만에 울었다. 소설은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힘을 준다고 한다. 바빠지는 일상에 감정이 메말라가는 듯해 중고서점에서 소설책 몇 권을 사 왔다. 주홍빛 책 커버에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중 한 명 일 것 같은 한 여인이 글자 아래 조그맣고 까만 그림자로 고개 숙인 모습이다. 새 책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커버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존재감이 더 커진 3명의 같은 여인 그림과 밝은 빛의 색깔이 멋스럽다. '엄마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말에 자꾸 나의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가 있어서 좋고 감사하다.
이 책은 엄마를 통해 세상에 나온 모든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주는 책이다. 엄마에 대한 책을 나도 쓰고 있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이지만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같은 여자로서 엄마 삶을 타 독 타 독 등 두드리듯이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당신의 삶이 그래도 성공적이었고, 너무나 잘 살아오신 삶임을 알려드리고 싶은 소망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책의 느낌을 신경숙 작가는 정말 잘 그려냈다. 처음 도입부를 읽으면서 작가의 실제 이야기인 줄 알았다. 책을 읽으며 이렇게 빠르게 감정을 점령당한 적이 드물다.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도 마음이 아련해지는 게 며칠 지속되었다.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라는 리스트의 말로 들어가는 첫 페이지다. 다음장으로 소설이 시작되는데 첫 문장이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고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왜?라는 질문 속으로 빠르게 독자를 끌어 드린다. 책의 구성이 독특하다. 글을 쓰는 딸이 '너'라는 이름으로 글을 이끌어 간다. 엄마를 찾는 작가가 자신의 이름 대신 '오빠 집에 모여 있던 너의 가족들은......'라고 시작하는 글 속에 '너'라는 이름으로 본인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드러낸다. 처음에는 균형을 잡기 다소 힘들었다. 하지만 읽어가면서 '너'를 '나'로 생각하면서 읽다 보니 파도가 잔잔해지듯이 글의 느낌이 다가왔다. 가끔 자신이 미워질 때가 있다. 타인처럼 생각하고 질타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엄마를 잃어 버진 작가가 자신을 '나'가 아닌 '너'로 표현함으로써 스스로를 질책하는 느낌이 든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로 시작하는 작가의 큰 아들 관점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엄마를 잃어버린 그도 벗어날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섯 아이를 키워내지만 거의 후반부까지 4명의 아이의 이야기가 나와 그 한 명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증을 유발했다. 무심한 남편이자 삶의 고단한 아내를 그저 당연성으로 대한 남편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아내가 끓여주던 음식을 먹고 있었을 때가 그때가 행복했다는 것을 놓치고 나서야 깨닫는다.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비가 내리고 난 오후 아내가 끓여 주던 된장국이 절실히 그립다고. 그렇게 가까이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영혼이 된 엄마가 똑똑하고 야무진 둘째 딸의 삶을 새가 되어 바라보는 모습을 그려준다. 가슴 한 구석에 큰 돌덩이를 올려둔 듯한 느낌으로 읽었다. 약사였고, 나름 공부도 잘해 큰 기대를 품고 있던 엄마에게 아이 셋을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딸을 쓰다듬듯이 이야기한다. 친정 엄마는 외손주의 재롱보다 자신의 딸이 힘들지 않을까를 더 걱정한다. '내 새끼' 참으로 투박한 말이지만 엄마가 쓰는 이 말처럼 마음 따듯한 말이 있을까?
소설 속 세상살이가 참으로 벅차다는 느낌이 든다. 한 인간의 인생에 다양한 삶의 돌들이 하나씩 머리 위 바구니 속으로 들어간다. 결국, 그 무거워진 바구니가 엄마라는 이 여인 '박소녀'의 삶의 무게가 되어 오히려 이승이 아니라 저승에서 행복감과 가벼움을 느끼게 해 준다. '박소녀' 이름과 어울리지 않을 외모를 갖게 된 그녀는 한 때 그 이름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시절이 있었으리라. 우리들의 엄마들도 꿈 많았던 세상 물정은 몰라도 장밋빛 인생을 꿈꾸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엄마를 보면서 소녀를 연상하기 힘들다. 다만, 그녀를 한 인간으로 삶을 나름 이끌어 온 인생 선배로서 존중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소설 속 '박소녀'는 나의 엄마와 너무도 닮아 있어 가슴이 더 시렸던 것 같다. 다섯 자식들을 위해 고추장, 된장, 청국장, 간장을 해마다 만들어 보내주신다. 일 년 열두 달이 바쁘다. 겨울이면 도시에서 끓이기 힘든 곰국과 자식들 몸속 건강을 채워주는 환으로 만든 울금, 비닐하우스에서 키우신 각종 야채 그리고 김치만 먹다 보면 질린다고 새롭게 담근 파김치와 겉절이가 날아온다. 채소를 비닐하우스에 길러 겨울이면 채소값 비싸다고 한가득 수확해서 보내오시는 그 마음을 당연하게 받았던 이기적인 딸을 나도 '너'로 부르고 싶을 때가 있었다. 봄이면 들판 가득한 야채의 생기를 받으라고 또 한 번 야채를 박스 가득 담아 흩어져 사는 다섯 자식 집으로 쏟아 보낸다. 여름이면 감자와 양파를 박스 한가득 보내시고 가을이면 감과 옥수수 박스가 우리를 찾아온다. 엄마가 보내신 음식만으로 산을 쌓을 만큼이라고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곤 했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인상에 남는다. 영혼이 되어 그녀가 찾아간 곳은 바로 그녀의 어머니 품이다. '내 새끼. 엄마가 양팔을 벌리네. 엄마가 방금 죽은 아이를 품에 안듯이 나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네. 내 발에서 파란 슬리퍼를 벗기고 나의 두발을 엄마의 무릎으로 끌어올리네. 엄마는 웃지 않네. 울지도 않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50년을 신랑의 집에서 자식 낳고 삶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그래도 마지막 휴식처는 결국 자신의 엄마가 계신 품을 선택한다. 엄마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했었다. 나의 엄마 자리로 충분히 행복했을 것이라는 자식인 우리가 갖는 착각이다. 엄마인 나에게 엄마가 필요하듯이 내 엄마도 엄마가 필요하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준다.
젓은 낙엽이 되어 세상의 나무에서 떨어져 버린 박소녀 할머니. 새싹처럼 자라 푸른 잎을 돋고 인생의 가을에 비를 맞고 떨어진 젓은 낙엽은 거리의 땅에 대고 외친다. 나도 이제 흙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녀의 삶이 마치 이와 같다. 영혼의 쉼을 가질 수 있었던 곳도 그녀의 엄마가 계시는 고향이다.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보낸 아이를 키워낸 곳이 아니라. 우리는 엄마를 잃어선 안된다. 지금 곁에 계시면 존재에 감사를 표현하면 되고, 만약 이미 이별을 했다면 마음으로 그분을 불러 보면 된다. 신이 엄마라는 사람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에 감사하고 나 또한 신의 소명으로 내 아이의 엄마로 잘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