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권 독서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엘리자베스 키스, 로버트슨 스콧

by 조윤효

수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처럼 만나지는 책이 있다. 그림이 예뻐서 샀었던 책이었는데, 책장을 정리하다가 발견되어 읽게 된 책이다. 거부할 수 없는 사실 중 하나가 나는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을 그린 익숙하면서도 정감이 넘치는 모습을 그려낸 엘리자버스 키스의 목판화 그림들이 마음을 끌었다. 내가 나를 보는 모습이 남이 나를 보는 모습과 다르듯이 내가 책을 통해 배운 19세기의 한국 풍경이 이방인인 그녀의 눈으로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한국여행을 했던 스코틀랜드 태생의 엘리자베스 키스는 그림을 그렸고, 결혼한 동생 로버트슨 스콧은 ‘올드 코리아’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을 번역한 송영달 교수도 엘리자베스의 키스의 열렬한 수집가로 각각의 그림 아래 연한 색으로 그의 목소리가 들어가 있다. 원래 외국에 살다 보면 고국에 대한 향수가 진해 진다. 그는 미국에 살면서 이 책을 번역했고, 한국을 ‘나의 특별히 사랑하는 한국’이라 칭하는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에 애정이 묻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1915년부터 한국, 일본,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을 여행하면서 그림을 그린 화가다. 동생이 결혼하고 일본에서 살게 되어 잠깐 방문할 목적으로 아시아에 발을 들이지만, 일본에서 목판화를 배우고 동양의 매력을 그 판화 속에 쏟아 넣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갖게 된 것 같다.


자매의 합작품 ‘올드 코리아’는 화가의 여행기이며, 일본의 야만성을 지적하고 한국을 서양 세계에 알리고자 한 인도 주의자의 양심서 같은 책이라 이야기 한다. 키스는 100여 점이 넘는 그림을 목판화로 남겼고,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뜻한 시선을 보냈으며 사라져 가는 동양의 고유문화를 화폭에 담고자 했다는 저자의 평에 공감이 간다. 그녀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애정이 느껴진다. 유난히 총명한 눈빛의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은 그녀의 호감이 담긴 듯하다.


목판화로 그림을 그리고 동판으로 채색 판화를 만드는 과정을 밟아온 그녀는, 화가로서 입지를 세워 나간 계기가 적십자 모금을 위한 화집 발간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세계가 강자 독식의 개념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던 2차 세계대전에 만들어진 책은 평화롭고 순수하게 살아가려는 서민들의 삶이 더욱 값지게 느껴졌을 것 같다.


그녀가 소개한 한국의 여인들과 남자들 그리고 물건을 파는 가게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귀한 자료가 된다. 일본 식민지 속에서 한국의 정서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사람들과 건물들 그리고 자연예찬 이야기는 조용하게 아련한 향기를 품어내고 있다.


‘한옥 내부’라는 그림 속을 보면서 고난한 시대 속에서 가정이라는 작은 공간이 서로에게 편안한 안식처로서 더욱 각별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마루에서 식사하는 한 남자와 높은 문턱 뒤에 서있는 아이를 돌보는 여자의 그림은 따뜻하다. 방으로 들어가는 문위에 걸린 화려한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그림 속 새는 시간을 상징하고, 개는 도둑을 방지하기 위함을 보여주고, 사납게 생긴 사자나 호랑이는 악귀를 쫓는다는 한국인의 믿음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그림뿐만 아니라 그림 속 한국인들의 정서를 이해하기 위한 명확하지 않았을 통역을 끈기 있고 주의 깊게 들었을 화가와 그녀의 동생 모습이 겹쳐 떠오른다. 사랑방 기둥에 새겨진 ‘집에 연기가 자욱한 것은 즐거운 일이다’라는 글귀까지도 정겹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던 그 시대에 건물들이 괴상한 일본식으로 바뀌어가고 있다고 그녀들의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보여 준다. 그 시절 모자 가게나, 돗자리, 놋그릇을 파는 가게들은 다행히 한국식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달을 쳐다보는데 최고로 좋은 집’이라 적힌 주막에 대한 글귀도 인상적이다. 운치와 재치가 보이는 조상들의 생계 터전이 마치 폭풍우 몰아치는 들판의 작은 들꽃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하는 강인한 들꽃 같은 삶을 살아낸 사람들을 조용하고 겸허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한복 속에 많은 고통이 숨겨져 있다니 ‘한국 사람들은 우리들의 현대 문명과는 전혀 다른 그들만의 순수한 정신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깊이 파고들수록 한국 사람의 문화를 더 존경하게 됩니다’라는 선교사 게일과의 이야기가 위로가 된다. 캐나다 출신의 유능한 선교사 게일이 한국을 보는 시선과 엘리자베스 키스의 시선이 같은 점을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든다.

아시아에서 기독교 전파가 어려웠지만 한국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글자가 있어 예외적 국가라는 말도 다시 한번 세종 대왕의 현명함에 감사함이 느껴진다. 한국은 기독교를 새로 받아 들인 나라들 중에서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는 유일한 나라라는 말처럼 최악의 빈곤국가로 유엔의 도움을 받았던 나라 중 유일하게 다른 나라에 원조를 줄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는 말은 우리의 저력을 생각하게 된다.


아이를 업고 있는 모자 그림이나, 바느질 하는 여자, 맷돌 돌리는 여자, 아낙네들의 아침수다, 새 신부, 여승이었던 동씨, 무당의 춤 그리고 빨래하는 아낙들의 그림들은 따스함을 품고 있다. ‘동양의 어린 여자 아이들에게 특수한 매력이 있다. 부드러움, 전혀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듯한 태도, 섬세한 선과 색,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 등은 하늘하늘 한 꽃을 연상시킨다.’


화가의 다양한 한국인들의 그림 중, 나이 든 남자들의 얼굴에서는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나는 그늘이 보인다. 일본에게 합병당한 삶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는 시대의 억울을 담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여자들의 그림 속에서는 총명의 눈길과 가족과 자식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 같은 것들이 보인다.


일본이 한국인들의 순수한 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한 폭행들 속에서 한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선교사들의 이야기나 삼일 운동을 조용하게 준비한 학생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역경과 시련은 사람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한국인들이 겪고 있는 시련은 오히려 한국인의 의젓한 품성과 차분한 태도를 돋보이게 해 주었다. 내가 만난 다양한 한국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참된 기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을 사랑한 한 화가의 그림을 통해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의 핍박 속에서도 한국인 만의 자긍심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오늘을 만들어 준 조상들의 조용한 힘을 느끼게 해 준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에게 어떤 정신적 가치를 물려줄지 깊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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