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수업]- 김헌
대략 백 년 전후만을 살 수 있는 인간이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전 예찬을 노래하는 김헌 교수의 책은 그 가능성을 보여 준다. 왜 고리타분해 보이고 난해한 그 책들을 만나야 하는지 가랑비에 옷 젓듯 설득시킨다. 쓴 약을 먹지 않으려는 아이들의 약에 달달한 맛을 넣어 쉽게 먹게 하듯이 그의 책은 고전이라는 쓴 약을 대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사탕발림이 될 것이다.
고전은 삶의 풍요를 느끼고 더 행복하게 존재하는 방법이 녹아들어 가 있다. 수백 년을 살아남은 책은 분명한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 어디든 쉽게 발견되면 보물이라 말할 수 없다. 고전은 분명 숨겨진 보물이다. 책을 대면하고 광부가 금맥을 캐내듯 꾸준하게 읽어 나간다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그 답답함에 대한 실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질문하기 위한 학문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래서 가슴에 질문을 담고 있는 사람이 철학자가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모든 것을 수용해 버리면 몸과 마음이 편하지만 더 이상 질문이 생기지 않고, 질문이 사라지면 우리에게 남는 건 생존이라는 그 기본 진리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것 같다.
나와 세상의 경계를 허무는 9가지 질문과 고전의 이야기들이 묘하게 연계되면서 관련 지혜의 그 작은 팁을 발견하는 느낌이다. 질문을 마주하는 순간 답을 찾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고 그 의지는 인생을 항해하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존재와 죽음, 자존과 행복, 타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만나는 9가지 질문은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로 시작이 된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만족스럽고 행복할 수 있을까? 세상의 한 조각으로 나는 무엇일 수 있을까? 변화하는 세상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역사가 될 수 있을까?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가능한가? 잘 적응하려면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일상에 녹아들다 보면 쉽게 잊히는 질문들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쾌락을 중시하고 욕망을 채워야 한다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절제하는 생활을 통해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스토아학파는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저자가 소개한 퓌론이 만든 ‘회의학파’에 대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판단을 중지하라는 에포케(epoche)라는 정신으로 결정을 내리기 전 다시 한번 생각하고 판단이 서면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라는 이야기다. 판단과 결정사이의 에포케 정신은 선급함의 무모한 행동의 완충제 같다.
에포케 정신이 습관이 되면, 질문을 지속하는 힘이 된다고 한다. 꿋꿋이 행동하고 융통성을 갖고 행동을 하게 된다는 저자의 말이다.
돌더미만 남아 있는 아폴론 신전 사진은 쇠잔한 삶의 결말을 보여준다. 찬란했듯 초라했든 시간의 흐름 속에 모든 것이 역사의 뒤꼍으로 사라지는 것임을 보여 준다. 질문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도왔던 소크라 테스의 산파법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표현이 아폴론 신전보다 더 잘 기억되는 사실이다. 의문을 품은 자가 스스로 지혜를 낳을 수 있도록 질문을 도왔던 소크라테스는 단 한 권의 책도 남겨두지 않았다. 단지, 그의 사상을 제자인 플라톤의 책에서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두 마리의 독수리를 양쪽 방향으로 날아가게 해서 만나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 여겨 그곳에 아폴론 신전이 자리하고 있다. 아폴론 신전에 배꼽을 상징하는 옴파로스라는 돌의 사진은 독특하다. 그 옛날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뿐만 아니라 세상과 끊임없이 연결되는 무엇인가를 갈구했다.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존재로서의 나를 말해야 하나 아니면 나와 연계된 가족관계로 나를 규정해하나? ‘내가 아는 나’와 ‘남이 보는 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말했던 철학자 라캉은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했을까? 책을 읽어가며 여러 질문이 떠오른다. 그래서 철학은 질문을 만들어 내는 학문이라 했나 보다.
스스로를 마주하는 일의 무게를 보여주는 고전 속 인물인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익히 알려졌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한 왕국의 왕이 되었지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알고 그 괴로운 마음에 스스로의 눈을 멀게 하고 결국 길거리 부랑자로 생을 마감했다. 자신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때로 이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내적 무게감이 생길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에 더 공감이 되는 이유이기도 한다. 진실 같은 거짓말의 세계와 거짓말 같은 현실 세계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에 대한 정의를 내려봐야 겠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귀향하는 오디세우스의 여행에서 또 다른 교훈이 숨겨져 있다. 오디세우스는 젊게 영생할 수 있는 삶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늙어가고 죽음을 맞이하는 집을 선택하느냐에서 후자를 선택했다. 이는 잊히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기억되는 죽음을 맞을 것이인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죽음이 있어 의미 있는 삶이라는 소제목도 공감이 된다. 유한한 삶의 길에 자신만의 충만한 감정을 느낄 때 그 순간들이 빛나고 우리의 삶은 풍성해진다. ‘모든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죽음이 사실은 모든 존재를 빛나게 만드는 셈이다.’ 이것이 죽음이 가진 진짜 의미라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누나나 자신의 삶에서는 주연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책에 소개된 우화도 기억에 남는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당신은 소중합니다’라는 조각하나를 발견하자 모든 사람들이 서로 갖고자 다툰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가 조각의 다른 한 부분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리고 그들 역시 소중합니다.’ 자신이 주인공이듯 모든 타자들도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소중하듯이 그들 또한 소중한 존재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각자 똑같은 옷걸이이지만 사회적 지위나 ‘부’라는 옷으로 옷걸이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는 말도 인상 깊다.
세계는 커다란 공허에 가까운 카오스에서 시작해 인류 최초의 신들인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 지하세계를 지배하는 타르타로 스 그리고 사랑뿐만 아니라 일종의 에너지인 에로스가 최초의 신이라고 한다. 대지의 여신이 가이아가 자신이 낳은 자식 중 한 명인 우라노스와 결혼해 12명의 아이를 낳지만 자신의 권위를 넘볼걸 두려워 12 자식을 가이아에게 가둔 우라노스는 그중의 한 아이인 크로노스에게 지위를 뺏긴다. 크로노스 또한 자신의 아이들을 자신의 배속에 가두어 두지만 막내인 제우스가 그를 물리치고 세계를 형제들과 나누어 지배한다. 하늘을 지배한 제우스, 형인 포세이돈에게는 바다를, 누나인 하데스에게는 지하세계라는 영역을 나누고, 자식들 8명과 다른 형제 4명을 열두신이라는 이름으로 공정하게 함께 지배했기 때문에 제우스는 그의 아버지와 할 아버지와는 달리 위협받지 않고 신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의 맞대결이 불가피함을 신화 속에서도 보여 준다. 새로운 세대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회를 주고 역할과 책임을 줌으로써 계속해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제우스의 이야기다.
‘고전은 인생의 메뉴엘이다’라는 저자의 묘사가 공감이 간다. 우리가 새롭게 구입한 기계 설명서를 어떤 사람은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고, 어떤 이는 대충 또는 아예 읽지를 않는다. 결국, 그 기계가 가지고 있는 성능을 100% 쓸 수 있는 사람은 메뉴엘을 제대로 읽어 낸 사람이라고 한다. 고전이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을 위한 메뉴엘이기 때문에 오래되다의 ‘고(옛고)’ 자보 다는 높이 있다는 ‘고(높을고)’가 더 어울리다는 그의 해석력도 다 고전 덕분인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한 때 우리는 질문이 많았던 사람들이다. 고전을 통해 다시 그 질문을 삶의 현장으로 불러내야 하지 않을까? 인생 메뉴얼을 제대로 읽어 낼 때 우리의 삶의 질은 고전의 위치만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