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한 끼]-박경은
입속으로 들어오는 음식에 대해 ‘성스럽다’는 표현을 써 본 적이 있었나? 용어가 생각을 지배한다. 성스런 음식에 대한 정의를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음식을 좋아하는 기자다. 25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그녀가 좋아한 음식에 대한 호기심을 책으로 풀어냈다.
‘음식을 먹는 것은 저마다 고유한 본질과 세계를 만들어 가는 행위다.’ 멋스러운 표현이다. 섭취하는 음식이 곧 우리의 몸이 되어 우리를 말해준다. 서서히 교체되는 뼈는 6년에 한 번 완전하게 바뀌고, 매일 교체되는 혀의 미뢰는 그 변화의 속도가 눈부시게 빠르다.
음식을 먹는 방식과 특성은 사회의 모든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 그 사회를 깊이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가 저자처럼 음식에 대한 역사와 배경을 알아보는 것이다. 인류 역사와 함께 하며 오랫동안 정신문화를 지배해 온 종교는 특히 음식의 문화적 차원을 구성하는 한 요소임을 알 것 같다. 책은 사찰음식, 개신교, 천주교, 유대인이 즐겨 먹는 음식. 인도의 힌두교, 터키인들을 비롯한 무슬람들의 음식과 역사를 소개해 준다. 종교와 음식의 깊은 관계를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종교로 감싼 음식의 제한은 사람들의 행동과 사고까지 지배력을 발휘한다.
책은 ‘너무나 종교적인, 너무나 세속적인’, ‘하늘에 영광, 식탁엔 축복,’ 그리고 ‘먹는 인간, 수행하는 인간’에 대한 큰 주제로 물 흘러가듯이 다양한 음식과 역사를 소개해준다. 책 읽기가 지루해질 무렵 신선한 관점으로 읽어 내려가기 좋은 책이다. 저자가 소개한 음식사진도 보고 인터넷으로 관련 음식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어 ‘시장기’를 부른다. 알수록 맛보고 경험해 보고 싶어지는 음식들이 늘어난다.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과 함께 무언가를 먹는 행위에서 시작될 수 있다.’ 함께 먹는 음식만큼 따뜻한 음식이 있을까. ‘식구’라는 의미가 함께 밥을 먹는 구성원이라는 말이듯 공감하고 함께 먹는 음식은 결속력과 안정감을 주는 건 당연하다.
금요일 하루 만이라도 육식을 하지 않기 위해 생선을 먹는 관습을 가진 가톨릭 이야기와 예수와 마지막 만찬을 함께한 그의 제자들의 식탁에 놓였던 생선에 대한 이야기들은 흥미롭다. 천주교 신부님들의 ‘개고기’ 사랑(?)은 놀람으로 시작했다가 관용의 마음을 이해하게 한다. 천주교 포교를 위해 조선에 온 선교사가 당시 서민들의 주요 단백질 섭취 방법이 자신이 기르던 개였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의미로 구토를 하면서도 먹었다고 한다.
육식을 하지 않는 채식 주의자와, 유제품도 섭취한 지 않는 채식주의자인 비건주의자 이야기뿐만 아니라 자이나교의 철저한 음식 절제는 놀랍다. 자이나교에서는 땅속의 벌레도 죽일 수 없다는 생각으로 농사도 짓지 않고, 땅속에서 자라는 감자나 양파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불상생 즉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존중하고 생명을 헤치지 않는다는 기본 교리로 신도들의 음식 문화 및 직업까지 영향을 미친다.
종교 개혁 이전의 ‘버터 섭취권’에 대한 이야기는 ‘면죄부(교회에 헌금한 액수로 사후의 형벌을 줄이는 방법)’ 만큼 놀랍다. 일정 금식 기간의 육식금지나 버터 사용 금지가 강하던 시절 부자들은 빵과 함께 먹는 버터를 먹기 위해 헌금했다고 한다. 돈으로 버터 섭취권을 사서 먹을 만큼 버터는 중요한 식품이었다. 조금 확장해석해 보면 버터를 자유롭게 먹기 위해 종교 개혁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저자의 말도 공감이 된다. 종교 개혁자 중 한 명인 루터가 몰래 숨어서 버터 바른 빵을 놓고 기도하는 장면이 상상이 된다.
일본의 다쿠안 스님이 먹기 시작해 그의 이름을 딴 ‘다쿠앙’은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식문화다. 사찰에서 단무지의 역할은 중요하다. 모든 음식을 한 톨의 찌꺼기 없이 먹어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단무지 하나가 그릇을 깨끗하게 닦는 용도로 쓰인 후 입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그릇에 물을 부어 행군 후 다시 입속으로 들어간다. 어떻게 보면 비위생적일 것 같지만, 음식 섭취 또한 수행의 기본으로 삼는 스님들의 삶이 보인다.
유대인 박해가 심했던 시절 양파처럼 생긴 ‘아티초크’은 흔한 음식 재료였고, 유대인들은 남들이 잘 먹지 않았던 그런 식재료조차 맛있는 음식으로 탄생시켰음을 보여 준다.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에 메리트, 시리아, 터기의 국민들은 차에 많은 설탕을 넣어 먹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비만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브를 유혹한 선악과가 ‘토마토’라는 말도 흥미롭다. 수도승들이 만들어 낸 포도주는 수도원의 중요한 수입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지식인과 부자들이 커피를 즐겨 마시자 포도주의 구매가 떨어졌다. 그러자 교회는 커피를 ‘악마의 음료’라 칭하고 마시는 것을 자제시키려 했다는 이야기도 웃음을 자아낸다. 결국, 커피의 맛이 궁금한 교황이 커피에 우유를 넣어 마시는 습관까지 생겨 그의 이름을 딴 ‘카푸치노’는 오늘날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따뜻한 카푸치노 한잔이 추운 겨울 또는 쓸쓸함이 몰려드는 날에 포근함과 위안감을 준다.
여전히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 올려진 빵에 대한 논란이 오늘날 까지도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종교와 음식은 이렇게 화합 또는 분열의 요소가 될 수 있다. 신은 이런 분열을 분명 싫어하실 것인데 인간들은 아주 작은 것들 조차 편 가르기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키우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스님들의 주요 단백질 공급원인 두부 만드는 공정이 까다롭고 힘들어 조선시대 양반들이 절에 가서 두부를 달라는 행패(?)를 부린 이야기는 웃프다(웃기고 슬프다). 작가 박완서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는 두부이야기를 통해 왜 감옥에서 막 나온 사람들이 두부를 먹는지 알 것 같다. 감옥에서 먹는 밥을 콩밥이라 부르는데, 두부는 콩으로부터 풀려난 상태여서 다시는 콩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다시는 옥살이하지 말라는 뜻에서 두부를 먹는다고 한다.
사찰음식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정관 스님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모든 대상을 자기만의 고유한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서 저마다의 에너지가 나와요. 그걸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아무 문제가 없지요.’ 그녀의 음식을 대하는 손길이 사진 속에서도 신성하게 품어져 나오는 것 같다. 조계종이 운영하는 발우 공양이 3년 연속 미슐랭 스타로 선정된 이유를 알 것 같다. 음식의 맛뿐만 아니라 그 식재료를 대하는 요리자의 마음까지도 읽어냈기 때문인 것 같다.
벨기에 신부로 한국에서 60년 동안 영향력을 끼친 지정환 신부님의 이야기는 아름답다. 어렵고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농어촌에 들어가 사람들을 선심으로 도왔던 그가 ‘임실 치즈’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그를 통해 삶의 안정과 생활을 갖게 된 사람들이 사후 그려놓은 그의 벽초상화는 예수를 닮아 있다.
육류도살법, 먹는 방법, 섭취가 허용되는 식재료를 규정한 법인 카슈루트에 따라 선택된 재료와 방법으로 조리된 음식을 코셰르 음식이라고 한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코셰르 음식 소비자가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80% 힌두교 신자인 인도인들은 쇠고기를 먹지 않는데 특히 브라만종 쇠고기를 신성시한다고 한다. 인간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고, 우유를 공급해 주며, 소똥은 연료로 사용할 수 있어서 서민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초창기 소를 신성시해서 함부로 먹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 들고 쓸모없는 소를 그냥 거리에 방치한 결과도 함께 만들어 냈다고 한다. 거리를 어슬렁 거리는 늙은 유기소들이 도로의 위생과 질서를 망가 뜨리고 있다고 한다. 인도인의 20%가 이슬람권 사람들인데 그들이 소를 도축하고 수출하는 주요 세력이나, 급보수파인 모이총리 집권아래 소의 도축 금지와 수출 금지 그리고 그와 관련된 업에 대한 제약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또 하나의 어두운 역사가 되고 있음을 알 것 같다.
음식과 종교의 관계는 삶을 풍요롭게 하기도 하지만 제약의 힘으로도 쓰인다는 것을 알 것 같다. 육체를 건강하게 하는 음식과 정신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종교를 긍정적으로 제대로 쓸 수 있을 때 삶의 보물이 된다. 그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 인류 역사는 많은 어두운 그림자를 양성해 냈음을 알고 있다. 무엇이든 유저 User(사용자)가 누구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오랜만에 군침 도는 책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