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알베르 카뮈
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육체와 정신의 두 톱니바퀴를 가지고 사회라는 거대한 광장에서 질주하며 나의 길을 완성해 가는 삶을 만들고 그리고 조용하게 움직임을 놓아 버리는 게 삶이 아닐까?
내가 가진 생각들이 진정한 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위 환경과 노출된 사상들로 채워지지 않은 영혼 속으로 연기가 스며들듯 나를 채운 건 아닌가?
소설을 쓰는 작가 또한 그 시대상의 흔적이 그의 손끝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 시대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의 초점을 엿보는 것이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읽어보라는 어느 작가의 이야기로 소설을 가끔 읽는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라는 책은 너무도 유명해 그 줄거리까지 알고 있었기에 결말 전개를 따라가는 재미를 맛볼 수가 없었다. 소설은 반드시 비밀이 지켜져야 한다. 그래야 독자의 책 읽는 유희를 뺏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었던 이유는 그냥 알베르 카뮈가 살아냈던 시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지금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듯한 일상이다. 소설은 젊은이의 일상과 노년기의 삶을 뚜렷한 선을 긋듯 보여 준다. 주인공 뫼르소는 일하고 사랑하고 주말이면 가까운 교외로 일상을 탈출한다. 타인을 초대해 자신의 일상을 그려내고 영화도 보고 수영도 한다. 지금 시대와 다를 게 없다. 노년이 되면 양로원에 가거나 쓸쓸한 집안 가득 차 있는 공허를 채우기 위해 애완동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삶을 살기도 한다.
어머니의 죽음 조차 사회적 관습의 절차로 자신 안의 감정을 과장해서 드러내야 하는 사회. 사랑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법조차 일정한 틀이 있고, 이를 암묵적인 규칙으로 만들어 둔 시대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주인공 뫼르소의 말처럼 '죽음 가까이서 어머니는 해방감을 느끼며,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생겼을 것임에 틀림없다. 어느 누구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라는 말을 곱씹어 생각해 봐야 할 내용이다.
박완서 선생님의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자서전적 책의 여 주인공 아이가 할머니의 죽음 앞에 눈물을 보이지 않은 이유로 비난을 받던 장면이 떠오른다. 결국, 주의의 시선으로 모두를 만족시킬 만하게 대성통곡을 하고 나서야 사회적인 존재로 인정된다.
하지만, 뫼르소는 자신의 우발적이고 방아적인 살인죄로 기소되지만 어린 소녀 같은 눈치 빠름이 없어 결국 사회의 이방인으로서 그곳에서 추방된 것이다.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무기력함에 답답함이 느껴진다. 그의 감정 조차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그 무관심이랄까? 강한 햇빛이 그의 사유를 막고 정신적 피로감으로 생각을 놓아 버리는 사람. 언제부터 그런 무기력감이 일상이 된 것일까?
우리는 쉽게 판단하고 쉽게 결론 지어 버린다. 사회를 가득 채운 뉴스와 이야깃거리들 속에서 내가 가진 자가 아닌 또는 그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닌 우리가 만들어 낸 허울의 자를 들이 데고 사는 건 아닐까? 내가 가진 판단의 저울을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약간은 멀리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지만 무기력이 그 사이를 채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나의 삶을 한 발 뒤에서 관찰자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나 정신은 맑게 깨어 있어야 한다.
갑자기 '세상의 모든 딸들'이라는 소설이 떠오른다. 원시 시대의 삶을 실감 나게 잘 표현한 그 책에서도 사회적 공감을 거부한 여주인공의 슬픈 결말이 엿보인다.
결국, 사회라는 배안에서 개인을 과도하게 드러내면서 생기는 문제들에 대한 수많은 소설들은 우리에게 어떤 해안을 요구하는 것일까? 따를 것인가? 아니면 벗어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적당한 타협과 적당한 개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소설의 구조는 단순하지만 읽으면서 생각할 문제는 무거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