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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윤효 Apr 19. 2024

하루 한 권 독서

[하틀랜드]- 세라 스마시

‘아메리칸드림’이라 불리는 꿈의 나라 미국 문화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집 앞에 예쁘게 꾸며진 화단이나 편안해 보이는 거실의 소파와 널찍한 주방 위에 멋스럽게 놓여 있는 과일바구니가 놓인 모습이 아니라 쓸모없는 것들로 채워져 먼지가 가득한 방치된 지하실을 보는 느낌이다.


 농업을 생업으로 가난이 일상이 된 유럽이민자 다수로 구성된 캔자스 지역이 저자가 태어나 자란 곳이다. 10대에 우발적으로 임신하게 되고, 먹고살기 위해 남자를 선택하고, 폭력과 음주에 삶이 유린되고, 교육의 부재로 똑같은 삶이 전달되는 인생을 저자는 이야기한다. 증조할머니 도로시, 할머니 베티, 엄마 지니 그리고 저자의 삶이 가족이라는 밧줄로 서로의 인생을 결정시켜 버리는 그 과정을 끊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남자의 폭력으로 이혼하고, 먹고살기 위해 다시 결혼하는 반복된 삶의 굴곡, 가난 때문에 수시로 주거지가 바뀌고, 자신의 삶도 버거워 휘청거리는 어른들은 아이를 돌볼 여력이 없어 보인다. 


 어린 저자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자신 안의 안전한 공간, 죽으면 돌아갈 그 가상의 공간을 마련하고, 미래에 태어날 자신의 딸 오거스트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태어나서는 안될 딸이다. 할머니와 엄마의 대를 잇는 가난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10대에 우발적으로 태어날 그녀를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닫는 엄마가 되어 대화를 해나간다. ‘내 딸한테 라면 어떻게 하라고 말하면 좋을 가?’ 가상 딸이지만 저자를 지켜주는 누군가로 생각하고 자신의 유년시절을 잘 지켜준 수호신 같다. 환경을 탓하고, 포기하는 게 아니라 주위 어른들의 삶을 관찰하고,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고안해 낸 독특한 삶의 기술이다. 


 ‘내 존재의 가치는 우리 어머니나 그 이전의 무수한 사람들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당연한 게 아니라 입증해야 만 하는 것이 되었지.’ 10대에 엄마가 된 지니는 딸인 세라를 먹여 살려야 하는 의무의 대상으로 여겼을 것이다. 삶의 제한을 만드는 또 하나의 역경으로 엄마가 자신을 대하고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인 지니가 가장 행복해 보일 때, ‘나 사랑해?’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어린 꼬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엄마의 사랑한다는 말투는 침묵이나 다른 바 없이 잔인하게 느껴졌다는 저자의 한 줄 글은 사랑을 매번 확인하고 싶어 할 만큼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아이였음을 보여준다. 


 전투를 벌이듯 살아가는 엄마를 보면서 어린 세라는 그녀의 행복을 간절히 바라는 딸이었다고 한다. 타인과 다른 예쁜 외모로 엄마는 직장이나 사회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노동하는 기계, 아이를 낳는 생산자로서의 존재, 장식적 사물까지 겹으로 대상화된 존재였다고 한다. 


 가난한 여자의 몸에 대한 편에서는 미국 사회의 가장 취약한 영역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은행에 돈이 많은 유색인들은 또 다른 종류의 위험을 가지고 있듯이, 가난한 백인 노동자도 사회 편견으로 한계가 정해진다. 내 몸을 쓰고 버리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회. 아버지 닉이 힘들게 지어놓은 농사가 태풍이나 가뭄 같은 자연재해로 한해의 모든 수확물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환경에서 사회 안전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아버지 닉은 집을 짓는 일이나 가족을 떠나 막노동을 해야 하는 삶을 기꺼이 선택한다. 두 아이를 낳고 남편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한 엄마 베티는 막다른 골목에서 혼자 휘청거리는 느낌이 든다. 국영기업에서 불법 독성 폐기물을 운반하는 일을 하던 아버지 닉은 중금속 중독으로 심한 정신적 착란 시기를 보낸다. 그리고 이혼과 새아버지들의 출현은 어린 저자의 삶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을 것이다. 베티 할머니와 아니 할아버지의 집이 자신에게 더 안전한 곳임을 알고 그들과 살기로 선택한다. 


 건강보험의 업계가 커지면서 의료비가 상승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병원 가기 조차 힘든 생활을 잘 보여 준다. '위험과 돌봄을 못 받으면, 삶은 몸과 뇌에 흔적을 남긴다'는 저자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안정망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원초적 공포를 느끼고 싸우고 도망가도록 돕는 편도체가 커지고 유지되고 만성 스트레스로 인해 과도한 각성 상태가 지속된다고 한다. 그래서 신체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난과 여자라는 몸으로 이미 투 스트라이크를 받은 상태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마지막 한번 남은 기회를 처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죽지 않기 위해. 


 의료문제, 주택문제, 교육 문제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제도가 개개인들의 삶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정치란 이런 안전장치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어야 한다. 미국 사회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개인들의 삶에서 안전장치가 제거되는 것이다. 집을 사도록 싼 융자를 제공하다가 은행이라는 이익 단체가 주정부를 압박해 이자를 갑자기 올리면, 모텔이나 트랙터 집으로 이사를 가게 만든다. 의료 보험 제단의 이익을 위해 개개인의 의료보험이 턱 없이 높아 짐으로써, 병원비로 인해 더 깊은 가난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몸으로 돈을 벌어내는 삶이라, 조금의 여유가 생기면 약이나, 담배, 술로 삶을 삼켜버리듯 자신들의 몸에 기이한 보상을 해주는 문화인 것 같다.


 ‘나라가 부과하는 수치’ 편에서 이야기하는 무상 지원의 복지 혜택은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가난한 여인들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힘, 바로 자신의 직감을 믿고 살아 가지만, 사회적 제도나 문화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삶을 마감하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내 딸이 이런 상화이라면 어떻게 하길 바랄까?’라는 질문을 책 사이사이 던져준다. 그리고 자신 앞에 놓인 여러 장애물들을 하나씩 극복해 간다. 

‘너는 내 딸이 아니라 고양된 나 자신’이라는 깨달음을 통해 몸과 정신이 가치가 없다고 주입하는 사회에서 분리되어 표출된 자신의 힘이 그녀 안의 자리 잡은 딸임을 깨닫게 된다. 


캔자스의 농장에서 살아가는 일이 자연과 가까이에서 조용한 삶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어덯게든 찢고 나가고 싶은 갈망으로 갇힌 느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녀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을 들어가는 사람이 되고, 교수가 되었고, 태어나지 말아야 할 딸 오거스트와 작별을 하게 된다. 


 ‘민주주의와 인도주의 수호의 말을 지키는데도 이 나라는 아이들을 키우는데 실패했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나라에서 가장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의 부제를 느낀다. 

책을 보면서, 사회적 보장 시스템이 왜 필요한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극복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성장시키는 방법으로 또 다른 자아를 탄생시켜 보는 것이다. 저자처럼.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느낌으로 살아간다면 극복하지 못할 산은 없을 것 같다. 이 책 덕분에 멘토가 되어 줄 수 있는 친구를 내 안에서 만들어 냈다. 그녀와 함께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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