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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윤효 Jun 09. 2024

내 사랑, 고여사!

7. 삶으로부터 도망갈 차비조차 없었던 시절

삶이 고달플 때는 주위의 꽃조차 아무런 감흥을 줄 수 없다. 사람들이 따뜻한 봄볕을 즐기고 있을 때 또다시 겨울 뒤에 겨울이 엄마의 삶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금 살 돈이 없어 구례로 이사오기 전에 담가 둔 장으로 김치를 담글 수밖에 없으셨다고 한다. 500원만 있어도 장을 갈 수가 있었지만, 그 돈이 없어 수개월 동안 집 밖을 못 나가셨다고 한다. 주머니에 돈 한 푼이 없다는 것은 한 겨울의 강품만큼 사람의 몸과 마음을 움츠리게 한다. 소금이 없어 장으로 김치를 담가도 그나마 장이라고 있어서 김치를 담가 먹을 수 있다는 안도감도 잠시, 장도 다 떨어져 갈 무렵 엄마는 외가댁에도 걸어가셨다. 차마 돈 한 푼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시지 못하고, 장을 얻으러 가신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단호한 한마디, ‘시집간 딸에게 장을 주면, 그 딸이 가난하게 산다’고 주시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때 얼마나 속이 상하셨는지, 엄마는 자신의 딸들에게는 결혼해 살더라도 뭐든지 먼저 챙겨 주시기로 하셨다고 한다. 그 마음을 알기에 너무도 감사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엄마가 보내 주시는, 장, 된장, 청국장, 고추창, 고춧가루, 깨, 들깻가루, 참기름,매실 엑기스, 쌀은 사 먹어 본 적이 없다. 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장을 친정에서 받아 드시지 않으셔서 그런지, 그녀 형제들 중에서 엄마가 제일 잘 사신다. 


 매해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김치를 담글 때마다, 어머니는 자신의 그 시절을 이야기하신다. 그 시절의 절박함이 가슴 깊은 곳에 세겨져 있으셔서 그렇다. 당시 배추 농사가 잘 되어, 사료 장사를 하시던 마을분에게 작은 오빠가 자전거를 타고 읍내가게로 가져다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빠가 돌아오는 길에 그분에게 받아온 종이봉투에 담긴 소금(쌀 2대 정도의 분량)을 보고 엄마는 쌀 한 가마니를 받은 만큼 고마움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는 비닐봉지가 귀해 종이봉투를 만들어 썼다고 한다. 오빠 자전거 뒤에 실려 있는 그 소금이 그 어떤 선물보다 귀하고 값지게 느껴지셨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참 철없는 딸이었다. 영어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학원 김치까지 엄마가 담가 주시는 것을 당연하게 챙겨 왔으니 말이다. 엄마의 젊음이 우리 다섯 자식을 챙기는데 소진되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주는 밥 받아먹듯이 따박 따박 수년을 먹었다. 올해부터는 시골집에서 김치를 담그지 말고, 각자 담가 먹고, 부모님 댁에 담근 김치를 보내드리자고 형제들끼리 이야기를 했었다. 김장날이 잡히면, 오 형제 모두가 모여 김치를 담그고, 삶은 돼지고기로 맛있게 점심을 먹었었지만, 실제 김장은 엄마가 모두 준비해 둔 양념과 소금 절여진 배추를 버무린 식이였기에, 점점 연로해지시는 부모님에게는 무리가 된다.


 그때 당시 엄마의 마음은 시베리아 벌판에 홀로 서있는 느낌이 드셨을 것이다. 차비라도 있었더라면, 도망치고 싶을 만큼 삶은 그 시절 그렇게 가혹했다. 집안에 있는 옷들을 모두 뒤져봐도 동전 한 푼 나오지 않았으니 그 절망감이 오직 했을까. 도망치고 싶은 현실에서 살아내기 위한, 죽지 않기 위한 삶을 살아낸 적이 있던가. 그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을 나도 한번 겪은 적이 있다. 12시간의 산통이 지속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내 몸 안에서 빠져나와 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었다. 


 그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엄마는 어린 우리들을 집 밖으로 내보내고, 쇠망치로 방과 방사 이를 막고 있는 벽을 깨부스셨다. 혹시 집이 무너지면, 운명이 이 가혹한 세상을 떠나도록 자신을 도울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집은 다행히 무너지지 않았고, 좁은 방 두 개가 하나의 큰 방이 되었다고 한다.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힘이 들어 벽을 깨부수었던 시절, 그녀 삶의 이야기는 숙연하기까지 하다. 전 집주인이 만들어 놓고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은 돼지 마구가 있었는데, 그 콘크리트의 축사들도 엄마가 다 깨 부수었다고 한다. 여자의 힘으로 오죽 마음이 답답하셨으면, 그 단단한 벽돌들을 부스셨을까. 


 몇 년 전에 엄마 친구 중 한 분이, 오래된 집에서 살다 지쳐 새 집을 지어 살자고, 남편을 설득했지만, 도무지 허락을 안 해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하기 위해 오셨다고 한다. 엄마 친구가 직접 집을 두드려 부셔서 집이 무너지면 자신도 죽어야겠다고 말씀을 하시더란다. 엄마께서는 ‘내가 한번 해봤는데, 그래도 죽지 않더라고...’ 웃지 못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셨다고 한다. 


 집에 소라도 한 마리 키우면, 밖으로만 도시는 아버지가 들어오시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엄마는 흥대에 사시는 큰 큰아버지댁에 용기를 내서 가셨다고 한다. 차비도 없어 그곳까지 걸어가셨다. 지금은 차로 15분 정도 거리니, 당시 비포장 도로였던 그 길은 엄마 걸음으로 2~3시간은 걸렸을 것이다. 마루를 청소하고 있는 큰 큰어머니를 보고, 부탁을 하셨다고 한다. ‘형님, 정숙이 아버지가 도통 마음을 못 잡고 있어서, 집에 소라도 한 마리 키우면 마음을 잡고 살 것 같은데, 아주버님께 말씀드려 농지자금을 빌려 쓸 수 있게 좀 도와주세요.’ 그 말을 듣자 말자 큰 큰어머니는 들고 있던 걸레로 마루 여기저기를 세게 치시면서, ‘우리 쓸 돈도 모자라고, 우리도 빌려 쓰지 못하고 있네’라고 핀잔을 주시더라고 한다. 앉아보라는 소리는 고사하고, 가난하게 사는 동생 부인이 혹여 자신들에게 뭔가 얻으러 오는 것을 잔뜩 경계하는 그 말과 행동이 엄마에게는 충격이셨다. 그 길로 바로 걸어서 나오는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하염없이 흐러더란다. 돌아오는 그 흙길을 울면서 걸어오셨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우리를 키우면서 늘 이야기하셨다. ‘형제간에 삶의 수준이 비슷해야 한다. 그래야 의좋게 오랫동안 살 수 있다.’ 다른 형제보다 처지거나 못살면 안 된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참으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잘 살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해 온 것 같다. 부모님을 구심점으로 조금 처지는 자식이 있으면, 엄마는 자신의 방식 데로 빨리 일어설 수 있도록, 당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금전적인 도움을 주셨다. 다섯 형제가 엄마의 바람대로 비슷하게 잘 살고 있어 균형 잡힌 풍차의 날개가 되어 우리 가족은 화목하게 잘 돌아가고 있다. 


 작년 시제 때, 큰 큰어머니가 느닷없이 엄마에게 사과를 하시더란다. ‘내가 자네에게 참 잘못한 일이 많았네.’ 큰 큰어머니는 베푸시고 사시는 엄마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으셨던 것 같다. 항상 조상님께 드리는 음식뿐만 아니라, 시제를 모시로 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더 많은 음식을 준비하시는 엄마의 마음을 아신 것 같다. 자식들이 다 잘되고, 부모에게 마음을 다하는 우리 집 분위기는 모두 엄마의 헌신에서 나왔다. 


 몇 년 전의 우리 집에 닥친 홍수는 받기만 했던 내 마음을 정신이 번쩍 들게 한 자연이 준 선물이다. 어느새 나이가 드신 부모님이 눈에 들어왔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미루지 말고 곁에 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뵙고 마음을 표현해야겠다는 마음을 준 그 홍수가 고맙다. 


 양정 마을에 소를 사로 오셔도, 큰아버지들은 우리 집을 들르시지 않으셨다고 한다. 행여, 가난한 동생이 손 벌릴까 봐 미리 거리를 두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비어 있는 마구간에 작은 큰 아버지가 잠시 소좀 맞기 자고 하셨다고 한다. 시골 동네를 돌아다니시며, 소를 사서, 그 소를 키워주는 집과 이익을 나누는 ‘갈라먹기’를 했던 시절이었다. 다른 집들에게는 쉽게 소를 맡겨 키우게 하고, 서로 ‘갈라먹기’를 했던 큰아버지들은 가난한 우리 집에는 그런 제안을 하시지 않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마침 엄마에게는 작은 큰아버지가 소를 잠시 맞긴 상황이 생겼고, 소를 키울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사정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잘 키워 큰 이익을 낼 수 있으니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하셨다. 하지만, 작은 큰 아버지는 대답을 해주시지 않았고, 엄마는 읍을 향해 걸어가시는 작은 큰아버지를 뒤쫓아 가면서, 계속 부탁을 하셨다고 한다. 결국, 허락을 받아낸 엄마는 정말 최선을 다해 소를 키워 냈다고 한다. 들판에 풀을 정성 들여 잘라 소를 키워, 큰 이익을 내서 나눌 수 있었고, 돈 한 푼 없던 그녀에게는 소가 또 다른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신다.

 

 소를 키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아신 엄마는 정말 어렵게 동생인 부산 이모에게 전화를 하셨다고 한다. 당시 이모부는 월남전 참전으로 번 돈으로 부산에서 태권도 도장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100만 원만 빌려 준다면, 소 몇 마리 사서 자립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엄마의 사정을 듣고, 이모는 두말없이 선뜻 200만 원을 보내 주셨다고 한다. 그때의 이모 도움을 여전히 이야기하신다. 지금은 이모부가 돌아가셔서 안 계시지만, 매년 이모들을 집으로 초대해 그녀들만의 시간을 가지신지 수년 째다. 엄마는 이모에게도 매해 수확한 작물들을 이것저것 보내신다. 물에 빠진 듯한 자신의 삶에서 한 줄의 동아줄을 놓아준 이모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모가 빌려 준 돈으로 엄마는 외양간을 간단하게 짓고, 소 몇 마리를 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셨다. 당시 송아지 한 마리가 5만 원이었고, 간단하게 축사를 만드는데 60만 원을 쓰시고 나머지 돈으로 소 5~6마리를 사셨다고 한다. 그렇게 다시 엄마는 살아낼 방법을 찾았고, 돈을 만들어 내기 위한 몰입을 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녀는 집 근처 풀들을 잘라다 먹이고, 뜬쌀(쌀이 떠서 사람은 먹을 수 없는 쌀) 30 가마니를 사서, 작은 솥에 끊여 소들에게 먹이셨다. 큰 솥을 살 돈이 아까워 집에 있는 작은 솥으로 빡빡한 쌀을 삶아 퍼주다 보니 오른쪽 어깨 인대가 늘어나 왼손으로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녀가 혼자서 안간힘을 쓰는 동안 아버지는 여전히 집으로 들어오시지 않은 날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면서 어느덧 외양간에는 9마리의 소가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 우리 집 옆에 밭농사를 지셨던 분이 채소에 물을 주기 위해 전기를 빌려 달라고 하셨다고 한다. 나눠 쓰던 삶을 사시던 어머니는  별생각 없이 전기를 달아 주셨다고 한다. 소들을 먹이기 위해 풀을 베어 놓고 막 와상에 앉자마자, 누전이 되어 외양간에 있는 9마리가 갑자기 동시에 백락 같이 악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외양간으로 뛰어가보니 전기불이 천장에서 번쩍거리는 것을 보시고, 놀란 엄마는 스위치를 내렸지만, 소들의 울음이 멈추지를 않았다고 한다. 엄마는 갑자기 두꺼비집을 내리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주출돌을 뒷고 퓨즈를 내리자 소들이 잠잠해졌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엄마가 키가 작았거나, 전기 내린다고 스위치를 더 잡고 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고 하신다. 누가 알려 주신 것도 아니고, 느낌으로 행동했지만, 그때만큼은 엄마의 큰 키가 감사하셨다고 한다. 키가 작아 두깨비 집을 내리지 못했다면 대 참사가 날 뻔한 상황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외양간으로 가보니, 제일 좋은 큰 소 한 마리가 이미 죽어 있었다고 한다. 


 죽은 소를 보고, 엄마는 읍내에서 놀고 계신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렸다. 화투를 치고 놀고 계시던 아버지가 소 잡는 사람을 데리고 오셨지만, 거의 그저 가져간 수준이었다고 한다. 엄마의 소는 그렇게 다시 한번 마음 깊은 곳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 ‘울아버지가, 이런 사람 만나서 살라고, 나에게 글을 안 가르쳤다’라는 말을 엄마는 가끔 하셨다. 자신이 살아온 길을 글로 남길 수 있기를 바라셨지만, 능력 밖이라 생각하신 것 같다. 혼자 소풀을 베고, 죽은 소를 보고 있자니, 읍내에서 놀고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섞인 간접적인 하소연이었다. 


 그래서 자라오는 동안 엄마는 딸들인 우리에게 귀가 닳도록 이야기하셨다. 여자는 절대 남편에게만 의지해 살아서는 안된다. 혼자서도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다. 엄마의 바람 데로, 우리 두 딸은 나름 전문직을 가지고 있다. 언니는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요가를 만나 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요가원을 운영하고 있고,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몸을 다스리고,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정신적으로 지친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언니 덕분에 나의 일상에서 음식과 운동 그리고 내 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늘 생각하게 된다. 나 또한 영어 학원을 20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엄마가 우리에게 이야기했던 데로, 두 딸은 그렇게 엄마의 바람 데로, 남편만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독립적인 한 사람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조금씩 살림이 피면서, 엄마는 장을 가시면 비싸지 않은 내 옷들을 사 오시곤 했다. 집에 와 있던 큰 오빠가 왜 그렇게 옷을 자주 사주냐는 질문에 엄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딸은 더 많이 사랑해 주어야 결혼해서 남편에게 더 사랑받는 단다.’ 외할아버지가 오로시 아들만 편애하시던 시절을 거쳐, 남편의 사랑에 늘 목마름을 느끼셨던 엄마는 자신이 겪은 그런 아픔을 딸들에게 주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다.


 구례에서 살던 7년 동안 큰아버지들과 작은 아버지 가족들은 우리 집을 와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살림은 겨울이면 모피를 해 입을 만큼 윤택했지만, 양정마을에서 엄마는 홀로 살아내는 삶을 꿋꿋하게 해내셨다. 

부산에서 공부하던 큰 오빠는 엄마의 자부심이었다. 특별한 사교육도 없이 자신의 힘으로만 공부를 했던 오빠는 늘 전교 5등 안에 들었다. 대학 입시 원서를 쓸 때, 그의 담임 선생님은 서울 대학을 가야 한다고 원서를 써주시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동생들이 많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면, 그 생활비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결국, 이모가 오빠 학교 담임을 찾아가 포항공대 원서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오빠 학교에서는 학생 한 명을 서울대 보내면, 담임에게 포상금 100만 원을 주었다고 하니, 한 명이라도 서울대를 보내려는 선생님들이 쉽게 원서를 써주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6학년 담임 선생님이, 혹시 형제들 중에 이번에 대학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었다. 나는 손을 들어 오빠가 포항 공대를 간다고 했더니, 반 친구들 앞에서 그 학교가 수제가 모이는 곳이고, 서울대만큼 좋은 대학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오빠를 닮아 윤효도 공부를 잘하는구나!’라는 그 한마디의 칭찬은 수십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말로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들에게 칭찬을 들어 본 적이 몇 번 안돼서 그런지 6학년 담임선생님의 칭찬을 마음의 보석함에 소중하게 간직하게 된 것 같다. 


 큰 오빠가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큰어머니들과 작은 어머니가 막걸리를 빚어서(당시 큰집들은 명절이나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집에서 막걸리를 직접 담그셨다) 우리 집으로 축하하기 위해 찾아오셨다고 한다. 이사 온 지 7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형제분들이 우리 집에 오셨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자식이 부모를 살렸다’라는 표현을 하셨다.


 자식에 대한 열정을 단 한시도 자신의 삶에서 내려 두신 적이 없으신 분이 엄마다. 아직도 주방 한편의 물 한 사발은 그녀의 바램을 보여준다. 아침마다 불경을 틀어 두고 3000줄의 염주를 돌리면서 지금 글을 쓰는 이 시간에도 엄마의 기도는 진행 중일 것이다. 그녀의 삶을 담아내는 일이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 덕분에, 내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삶이 글이 되는 순간 역사가 된다. 엄마의 그 고난했던 삶이 역사가 되는 이 과정이 감사하다. 살아내는 삶을 살고 있다면, 누릴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삶은 이렇게 파도의 물결처럼 오르고 내리고 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집 오남매>

<큰 오빠, 대학 졸업때>

<엄마와 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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