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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윤효 Jun 16. 2024

내 사랑, 고여사!

8. 다섯 자식 각기 다른 지역으로 떠나보내는 어미새

인간에게 자식이란 무엇인가?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홀로 살아가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한다. 만약, 신이 있다면, 왜 인간에게 유독 많은 시간을 필요하게 하셨을까. 영생을 꿈꾸는 인간에게 자신의 자식을 통해 유전자를 남기고, 그 존재로 신과 닮은 삶을 살아 보라는 뜻은 아닐까. 그래서 타인을 이롭게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신의 손길을 받는 것 같다. 삶은 긴 듯 하지만, 짧다. 부모가 우리에게 영생의 힘을 주는 것이다. 내가 죽더라도 내 자손들이 내 유전자를 가지고 살아가니 죽지만, 죽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래서 서로 주고받는 바통 전달의 시간이 길다.


 엄마의 자식 사랑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다섯 자식 모두 결혼하고, 장성한 아이들을 키워낸 언니, 오빠들도 여전히 엄마에게는 보살펴 줘야 할 것 같은 자식들이다. 나와 동생은 아직 성년이 안된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그녀의 세밀한 관심은 더 깊다. 키 크는데 도움이 되는 약이나, 머리가 좋아지는 곡물을 갈아서 보내주시곤 한다. 자식들 모두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키워내고 있고, 중장년을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입속에 들어갈 음식들을 여전히 신경 쓰시고 있다.


 철마다 쉬지 않고 엄마의 손길로 길러진 야채가 든 식자재가 박스를 타고 날아온다. 건강 관리를 우선으로 하시는 엄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안해 낸 다양한 건강식품을 보내오신다. 아침에 쉽게 타먹을 수 있도록, 몸에 좋은 콩과 다른 곡물들을 갈아 보내오신다. 누룽지를 끊여 그 가루들을 한두 숟가락 넣어서 먹으면 고소한 맛이 일품이 되는 수프가 된다. 울금이 건강에 좋지만, 가루로 먹기는 힘들다. 그래서, 엄마는 그 울금을 작은 환으로 만들어 보내 주신다. 아침과 저녁으로 영양제 먹듯이 한 숟가락씩 먹는다. 그냥 맹물만 마시면 맛이 없다고, 우엉을 말려 보내 주신다. 말린 우엉을 찬물에 넣어두면 어느새 우엉이 연한 커피색으로 전체 물을 물들인다. 겨울철이 다가오면, 생각을 꿀에 절여, 혹여 감기 기운이 있을 때 타 마시라고 당부의 말씀도 잊지 않으신다. 몸이 허할 때 먹으라고 꿀에 절인 마늘은 입속으로 바로 넣기 힘들어 요리할 때 쓰고 있다. 여름이면 김치가 맛이 없어진다고, 갓 담은 깻잎 김치를 보내 주신다. 가끔 콩나물도 직접 키워 보내주시면서도, 혹여 다듬기 귀찮은 건 아닌지 신경을 써 주신다. 쓰면서 느끼지만, 자신의 몸을 온통 자식들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내시는 삶을 지금도 사시고 있음을 알 것 같다. 


 아버지의 건강 비결이 엄마의 정성 어린 음식들임을 안다. 그래서 주위에서는 엄마에게 ‘도대체 무엇을 드려서, 바깥양반이 그렇게 정정 하시요?’라는 질문을 한다고 한다. 아버지는 80이 넘는 연세에도 턱걸이를 자식들보다 더 잘하시고, 시니어 골프에서 150미터 거리를 홀인원 하셨다. 한 번에 공을 쳐서 구멍 안에 넣을 수 있는 그 힘이 엄마의 음식으로부터다. 몇 년 전 홍수가 났을 때도 한 시간 가까이 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을 걸어 40마리 소의 목줄을 풀어 구해 내셨으니 체력이 웬만한 청년들보다 낫다는 말을 들으신다. 


 엄마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시다. 자신이 배우지 못했기에, 자식들만큼은 좋은 교육을 받고, 살아가는 동안 그 배움의 힘으로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원하셨다. 그래서, 시골에서 살았지만, 자식들을 한 명씩 도시로 보내 더 나은 교육을 받게 하셨다. 그 선두로 큰 오빠가 있었다. 중학교부터 부산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그 이후로 언니가 큰 오빠를 위해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작은 오빠는 구례에서 중학교를 나오고, 당시 명문고등학교였던 순천 고등학교를 들어갔다. 나 또한 중학교를 졸업하고, 시험을 쳐서 순천 여고를 갔다. 둘 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하숙을 했다. 집이 잘살지 못했던 다른 시골 출신의 아이들은 스스로 밥을 해서 먹고 다니는 자취 생활을 했지만, 우리 집은 자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숙을 시켜 주셨다. 매달 나가는 하숙비는 분명 부모님께는 큰 부담이셨을 것이다. 삶의 우선순위를 공부에 두고, 자식들 뒷바라지를 묵묵하게 해 주신 엄마의 힘임을 알 것 같다. 여고 시절, 학교 앞에서 하숙을 했던 나는 아침 7시까지 학교를 가야 했다. 자취를 하거나, 아침마다 봉고 차를 타고 학교를 다닌 다른 친구들에 비해 내 생활은 편했다. 하숙집 아줌마가 챙겨주는 밥을 먹고 점심도시락 하나와 가방을 메고 학교까지 들어가는 시간이 2~3분 거리였기 때문이다. 그 편안한 삶이 엄마의 자식을 사랑하는 배려임을 이제야 느낀다.


 큰오빠가 포항공대 대학교의 기숙사에 들어가고, 언니는 부산에 살고, 작은 오빠는 육군사관학교가 있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나는 순천에서 공부를 할 시기가 있었다. 구례, 포항, 부산, 서울, 순천... 이렇게 전국 방방 곳곳에 자식들을 심어 두시고, 자식들 용돈에 학비까지 온몸으로 견디는 삶을 살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명의 자식을 키우면서도 쉽지 않음을 알 것 같은데, 다섯 자식을 키워내신 그 힘은 엄마가 가지고 계신 삶의 신념 덕분이다. 배움이 삶의 기둥을 세워주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다섯 자식을 각기 다른 지역에서 키워내기 위해서 엄마는 자신의 몸을 마치 영원히 고장 나지 않을 것 같은 기계로 대하신 것 같다. 자식들 학비를 위해, 소를 키워 아버지가 돈을 잘 버실 수 있도록 조력을 아낌없이 하셨다. 가끔 두 자식이 한꺼번에 돈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오면 마음이 무거우셨다고 한다. 이렇게 자식들을 도시에서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는 돈은 항상 구멍 난 항아리처럼 채워도 채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간전에 살 때 멋 부리기를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엄마는 금반지와 금팔찌를 해드렸다고 한다. 가죽 신발에 가죽 재킷을 입고, 늘 밖으로 도시는 아버지는 간혹 일을 할 때가 생길 때면 반드시 장갑을 끼고 일을 하셨다고 하니, 당시 아버지의 모습이 상상이 간다. 철 안 든 남편과 살아가면서도 그를 위해 금반지와 금팔찌를 해드린 엄마의 마음이 무엇이었을까. 


구례로 이사 오고, 소를 키우면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것을 아신 엄마는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비셨다고 한다. ‘나중에, 돈 벌면 다시 해드릴 께요. 금반지, 금팔찌 팔아 우리 소 삽시다, 정숙(언니 이름) 아버지....’ 결국, 3번의 무릎을 꿇고 금반지와 금 팔지를 받아 소를 사셨다고 한다. 2년 가까이 소를 잘 먹였더니, 세끼를 낳고, 돈을 더 벌 수 있게 되어, 우리 집 주위의 170평 밭을 더 사셨다. 또한, 엄마 친구가 우리 집 주위에 300평의 밭을 가지고 계셨기에 그녀는 친구에게 땅을 사셨다. 1000평 가까이 되는 밭에 작물을 길러내기 위한 그녀의 열정이 시작되었다. 수박과 파밭을 일구고, 그 수확으로 자식들 가르칠 욕심에 쉼 없는 노동이 일상이 되었다.


 구례에서 친구들과 금반지 모임을 가지셨다고 한다. 서로 돈을 모아 순서대로, 금을 사서 주는 것이다. 엄마 차례가 되어 금반지를 받아 아버지께 다시 해드렸다고 한다. 그러나 돈이 항상 넉넉하지 못하다 보니, 그 이후 다시 한번 아버지에게 금반지를 팔자고 하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동도 보이시지 않으셨다고 한다. 엄마가 금바지를 요청하던 소리를 들었던 아버지의 이복형제인(친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시집오시기 전에 낳은 딸), 고모도 함께 아버지를 설득하셨다고 한다. 구례장을 보기 위해 하루 전날 우리 집에 오신 고모님도 오죽 답답했으면, 아버지를 설득하셨을까. 


 엄마는 밭일이 많아 아버지께 도우미를 좀 얻어 달라고 부탁을 하셨다고 한다. 당시 2명의 여자분들이 엄마를 돕기 위해 오셨는데 그들의 첫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아이고, 아주머니는 죽으면 개가 되겠소. 이렇게 넓은 밭을 매일 기어 다니며 일만 해야 하니 말이요.’ 그들의 눈에 비치는 밭이 얼마나 커 보였으면, 처음 보는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하셨을까. 


 내가 중학교 시절, 엄마는 힘들어도 나에게 일을 시키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당일에 수박을 다 심고 싶으셔서 내게 일을 도와 달라고 말하셨다. 그러나 나는 입이 툭 튀어나와 일을 시키기 힘드셨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내게, ‘이년아, 너는 나중에 커서 꼭 대통령 부인이 돼라.’라고 말하셨다. 한참 사춘기였고, 엄마의 고단한 삶이 어린 내게는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한 ‘대통령 부인이 돼라’라는 말이 가슴에 남아 있었는지, 꿈이 대통령이라는 말을 한 남자와 결혼해 살고 있다. 어릴 때 부모가 던진 말이 살아가는 동안 큰 영향을 발휘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아들에게 ‘100만 인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 돼라’라고 이야기한다. 녀석은 농담으로 넘어 가지만, 그의 깊은 마음속에 조약돌을 던져 나 본다. 살아가면서 내가 아들에게 했던 말이 잔잔한 파도가 되어 그의 삶을 이끌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명절이 되면, 모든 자식이 모여야 하지만, 각기 타향살이를 하다 보면 한 명씩이 빠지곤 했다. 누군가 한 명이 안 오면 왠지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몇 명인지 세어 본다. 가족들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긴 상에 숟가락, 젓가락을 사람 수에 맞게 놓아야 하기 때문에, 무슨 의식처럼 상을 차리는 동안 가족수를 셈한다. 형제들 모두가 다 왔을 때는 마음이 가득 찬 느낌이 드는데, 아마 부모님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학교 다닐 때는 형제가 많다는 게 부끄러웠다. 어쩔 때는 나를 빼고, 은근슬쩍 4명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이제는 이렇게 많은 형제들이 있다는 게 삶의 또 다른 행복임을 알 것 같다. 같은 부모 아래, 형제로 살아가며, 커가는 조카들을 보는 일이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멤버 20번인, 막내 동생의 딸 수하는 몇 년 전에 찍어둔 가족사진에서 왜 자신만 없는지 궁금해했었다. 곧 다시 대가족 사진을 찍어야 한다. 대가족 구성원 간의 삶의 부대낌은 가을철에 수확하는 풍성한 과일을 닮았다. 


 언니와 큰오빠는 부산에서 생활하면서, 학교 시험 때문에 가끔 큰오빠는 시골집에 올 수 없을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럴 때면, 오빠의 눈에서 살며시 올라오는 눈물이 언니에게는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멀어도 부모님이 계시는 집에 오고 싶은 마음이 오죽했을까. 부모라는 울타리가 주는 삶의 안정감은 그 어떤 힘보다 강하다.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우리를 향해 있는 그분들의 눈빛은 인생에서 만나는 한겨울 같은 바람을 녹여 주는 따뜻한 햇살이 된다. 유년시절, 다섯 형제가 오로시 같이 자라지는 못했지만, 부모님을 중심으로 우리 오 형제는 각기 다른 삶의 방식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 


어린 자식이 부모의  울타리가 필요하듯, 연로해 지신 부모도 자식의 울타리가 필요하다. 이렇게 인간의 삶은 자식과 부모가 서로에게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한다. 성인이 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인간은 다시 노년이 되어 긴 시간을 자식의 보살핌을 받으라는 신의 뜻인 것 같다. 글을 쓰면서 이제는 우리 자식들이 부모님께 든든한 삶의 울타리가 되어줄 시기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큰 오빠, 포항 공대 졸업 때>

<작은 오빠, 육군 사관학교 입학 때>

<막내 동생과 우리 집 마당 앞에서: 헌 옷만 입고 사시는 엄마를 위해 언니는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철마다 멋진 옷들을 엄마에게 보내주는 효녀였다. 자식들 키우는 엄마가 사치한다는 소리가 나올 까봐 조심스럽게 입으셨고, 어떤 옷들은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셨다고 한다.>

< 두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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