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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윤효 Jun 02. 2024

내 사랑, 고여사!

6. 나이 그 먼 거리만큼 서 있는 남편

인간은 사는 곳에 의해서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 동네에 사람이 많을 때는 집안의 시름이 있어도 이웃끼리 이야기도 하고, 없는 물건도 잠깐씩 빌려 쓰면서 가난한 삶은 그래도 살만해진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치유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장수 마을로 선정된 곳을 조사해 보니, 그 원인이 음식이나 특별 관리가 아니라 좋은 이웃이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마을 주민들끼리 수시로 음식을 나누어 먹고 파티하고, 서로 간의 안부를 물어주는 그 문화가 주민들을 장수하게 만든 것이다. 


 그릇이 부족하던 시절, 마을 사람들 각자가 자기 그릇들을 빌려 주던 시절이라, 그릇 뒤에 자신의 집 이름을 써놓고 서로 빌려 썼었던 곳을 떠나온 엄마는 쓰지도 않은 그릇들 오랫동안 보관 하셨다. 접시나 사발 뒤에 파란색 페인트로 번호가 매겨져 그 시절 나누어 쓰던 역사를 보여준다. 쓰지도 않을 그릇들을 오랫동안 간직하셨던 것은 엄마에게 그 시절의 추억과 향수가 남아 있어서 일 것이다. 집에 홍수가 나서 많은 것을 버릴 때 그때 엄마의 추억 물품도 함께 처분이 되었다. 그렇게 인간 냄새가 가득한 곳에서 사시던 엄마에게 양정마을은 마치 외딴섬처럼 느껴지셨다고 한다. 듬성듬성 이웃이 있기는 했지만, 함께 농사를 짓는 복기미와는 달리 각기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가축을 키우고 살았기에 이웃 간에 교류가 많지 않은 곳이었다. 우리 집 둘레를 둘러싼 밭은 한시도 손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생활구조였다. 엄마에게는 오로시 일만 해야 하는 곳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1년 365일 엄마의 손길을 기다리는 밭은 희망이기도 하면서 절망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양정마을을 선택하셨으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넓고 황량한 땅에 처자식을 데려다 두고 본인은 마음 놓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셨다. 엄마는 남부끄럽다고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하지 말라 하시지만, 그 과정을 기록하지 않고서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 쓸 수밖에 없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손에 든 시간이 영원할 것 같아 함부로 대하는 것이다. 학교를 제대로 다녀 교육을 받거나, 부모로부터 가정교육을 받았더라면, 자신의 삶을 함부로 내던지는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매 순간이 처음 살아보는 시간이 아닌가. 10대든 20대든 그리고 50대든 60대든, 그 처음 만나는 단계에서 자기중심을 가질 시간을 갖지 못했을 때, 잘못 밟아온 지난 발자국을 되돌아가서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자신이 가진 지식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생활태도와 약간의 유전자(엄마 말씀)는 삶을 어떻게 대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과, 친할머니의 방목형 자식교육은 아버지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주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성품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아버지라는 말을 엄마는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셨다. 사람들에게 거절하기를 못하고, 마냥 베풀기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친구 보증을 서주어 큰돈을 잃은 적도 있었다. 가끔 시장에서 물건을 사 오실 때도 더 비싸게 사 오실 때가 많았다. 엄마가 잔소리를 하시면, 아버지는 ‘그 사람들도 먹고살아야지’라고 응수하셨다. 


 심지어, 큰 오빠 때문에 엄마가 부산에 간 사이에 터미널 앞에 있는 논을, 동생인 ‘삼순이 고모’가 와서 설득하자, 외각에 있는 그녀의 논과 맞바꿔 주신 분이다. 엄마가 없는 틈을 타서 우리 집에 온 고모가 사정하고, 졸라데니 오빠로서 그냥 허락해 주신 것이다. 그것도 엄마에게 말씀도 해 주시지 않으셨고, 시간이 지난 후에야 우연히 알게 되셨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지 감이 온다.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우유조차 아끼고, 모아 오셨던 엄마에게는 배신당한 느낌이 드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소위 잘 노는 친구를 만나셨던 것 같다. 원래 성품이 유순하시고, 마음이 너그러우신 분이지만 친구의 영향을 벗어나시지는 못하셨다. 구례읍에 ‘이샌집’(그 집주인의 성이 이 씨라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에 남자들이 모여서 고스톱이나 삼봉(화투의 일종)을 밤새워 치는 곳이었다. 큰 도박이 아니라 함께 놀면서 돈을 걷어 맛있는 것 같이 먹고,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이샌집은 이런 사람들에게 아지터를 제공하고, 매달 장소제공과 음식을 사다 주면서 거기서 생기는 수입을 챙기는 곳이었다. 


나는 어려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지 않는 날이면 오빠나 엄마가 아버지를 모시로 가기도 했다. 또는 이샌집에 전화를 걸어 아버지와 통화를 할 때면, ‘응, 곧 갈게’가 3시간 심지어는 5시간 이후가 되기도 했다. 소장사가 본업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으셨던 아빠는 남는 시간은 무조건 이샌집에서 보내 셨다. 매일 밤늦게 들어오시고, 한 달에 5~6번 정도 날밤을 세고 들어 오시니 엄마 입장에서는 변변한 수입도 없이 견뎌내는 시간의 연속이었으리라. 아빠의 화투 취미는 그 이후로 30년 이상을 부모님의 결혼 생활에 큰 장애를 주었다. 


 놀이에 온통 정신이 팔리신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어 가정을 제대로 이끌고 싶은 마음은 뒷전이셨다. 집안의 모든 일과 생계를 엄마 혼자서 끌고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엄마는 점점 강해질 수밖에 없으셨으리라. 초등학교 시절에 부모님과 함께 나란히 저녁을 먹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시골은 소전(소를 팔고 사는 장)이 새벽 일찍 열린다. 아버지가 소전에 가시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시면, 부엌에서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자는 내 코를 건드렸다. 새벽 장에 가시는 아버지를 위해 정성을 들이신 엄마의 그 새벽밥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따뜻한 국밥이 참기름과 만나면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맛있다. 아버지가 드시던 그 국밥을 자다가 일어나 한 숟갈 얻어먹었던 언니, 오빠도 그 맛이 참으로 좋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이른 새벽 활동을 엄마는 그렇게 지원하셨다. 


 글을 쓰다가 느끼는 부분이 많다. 엄마는 항상 아버지를 가장으로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늘 아버지 밥을 먼저 퍼서 두었고, 아버지가 나가시거나 들어오실 때 일어나서 자식들이 인사하게 한 것이다. 아버지의 화투 사랑을 ‘원래는 좋은 분이셨는데, 친구를 잘못 만나 이렇게 되셨다’라는 말로 어린 우리에게 이야기를 종종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감정보다는 ‘우리 아버지는 좋은 분이시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자식들 마음에 자리 잡게 된 것 같다. 톨스토이의 말처럼, 존중은 사랑이 없는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감정같다.


 완전히 다른 타인이 만나 부부로서 살다 보면, 다툼도 생기고, 서로 오해도 하고, 상대를 내 맘대로 하고픈 욕심으로 상처가 되는 말을 쉽게 쏟아내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서로가 가지고 있던 모난 구석들이 자연스럽게 마모가 되고, 둥글둥글해지는 시기가 오면서 안전감이 드는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은 엄마의 일방적인 희생과 인내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밤늦게 들어오거나 날밤을 세고 들어 오시면 항상 미안한 내색을 보이셨지만, 문제는 그 행동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감사한 게, 소소한 말다툼은 있었지만, 육체적으로 또는 집안의 물건을 파괴하거나 하는 그런 과격한 부부싸움을 보여 주시지 않았던 것이다. 이 또한 엄마가 가지고 계셨던 규칙 같은 것이었으리라. 부부가 과격하게 다투면 그 모습을 본 아이에게 정신적 트라우마가 생길 수 있다. 아이 입장에서는 어느 편도 들 수 없어 괴롭고, 이를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기 때문에 영혼을 보호해 주는 막들이 하나씩 걷어지는 것이리라. 


 아버지의 부재를 당연하게 여기면서 자랐다. 어느 날, 나와 함께 수다를 떨던 수연이라는 친구가 그녀의 아버지와 백화점 가야 한다고 먼저 일어서는 것이었다. ‘아버지와도 쇼핑이 가능한가?’라는 의문과 함께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뭔가 자식들과 더 먼 거리에 그분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던 나에게, 친구 같은 아버지와 백화점 쇼핑 간다는 그 말은 다른 세계를 보는 것 같았다. 대학에 들어가고, 도시 삶을 보면서, 아버지와 잘 지내는 친구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낯선 이국땅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리고 서서히, 나의 남자 가치관이 형성되었다. 나에게 잘하는 남편이 아니라 내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 남자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된 것 같다. 


 법륜 스님의 강연을 들으면서 엄마의 지혜로움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우리를 낳아 주신 아버지를 홀대하거나 무시하는 모습을 부인이 아이들 앞에 보여 준다면, 그 아버지의 자식들인 우리의 존재감 또한 무시당하는 것이다. 삶의 지혜가 깊으신 엄마는 혼자 그 짐을 고스란히 안았고, 우리에게 전가시키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어릴 적 내 기억은 그가 뭔가 중요한 사람이고, 항상 먼저 챙겨 드려야 하고, 항상 밖으로 도시지만, 성품이 좋은 분이시란 것이다. 


 부부 생활 지침서에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다. 절대 아이들 앞에서 상대방의 단점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듣는 아이들은 편향된 부모의 표현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 부모의 모습을 세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가 된다는 것은 수행자의 모습을 닮은 것 같다. 쓰면서 비로소 느낀다. 엄마가 포기하지 않고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지켜 주셨기에 유년기 우리 자식들의 삶은 평화롭고 행복했다. 초등학교 시절 가끔 도시로 도망간 엄마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옷차림이 지저분해지고, 얼굴 가득 근심이 돌았던 우리 반의 친구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가정을 지켜 주신 엄마가 너무 감사하다. 요즘처럼 이혼이 흔한 시대에, 부모들이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물론, 자신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나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내 아이의 유년기는 평생을 살아가는 삶의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로서 아이들의 정서를 보호해 주기 위한 최소한의 몸짓이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혼자만의 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성의 문을 활짝 열고 맞이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스스로 성문을 닫고 열고, 오가는 사람을 들일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삶은 생기가 돈다. 열어둔 성문에 아무도 오지 않는 생활을 오래 해본 엄마는 외딴 섬 같은 양정 마을을 벋어나고 싶다고 수년 동안 이야기 하셨다. 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부부가 함께할 때 그 어떤 고난도 넘어설 수 있다. 결혼 후 영어학원을 2개 개원하고 운영하는 동안 참으로 힘들었다. 그러나 옆에서 묵묵하게 격려와 위로를 주는 남편 덕분에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뎠고, 그 힘든 일로 성숙함이 마치 선물처럼 나를 키워 준 것 같다. 그러나 엄마의 30대, 40대, 그리고 50대 나이에 ,언제나 부재중인 듯한 남편의 존재는 생각보다 힘든 시간이었으리라. 엄마에게 닥친 생활고에 아버지라는 버팀 몫만 있었더라도, 그렇게 많은 병들이 줄줄이 엄마를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부터 엄마의 몸에서는 힘들다는 신호가 나오기 시작했다. 심장이 먼저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용하다'(시골 사람들은 '잘한다'는 표현을 '용하다'라고 이야기한다.)는 한의원에 가서 한약 10재를 달여 드셔야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약을 사 오셨다. 당시의 한약은 지금처럼 간편하게 먹기 어려웠다. 하얀 한지 같은 종이에 한번 분량의 약재를 꺼내 물과 함께 오랫동안 달인 후 삼베에 달인 약재를 모두 넣고 짧고 굵은 나무 막대기 두 개로 비틀어 짜서 사발에 담아 마셔야 한다. 집안 가득한 한약 냄새와 그 약을 짜서 드시던 엄마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일상의 노동과 함께, 약 10재를 드시기 위해 너무 오랫동안 막대기를 비틀다 보니 손목과 손가락이 좋지 않아 결국 9재까지 밖에 못 드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불면증은 엄마의 삶을 더 힘들게 하셨다. 기다리는 삶이 일상이 되어서 그런지 깊은 잠을 주무시지 못했고, 갑상선이 엄마를 힘들게 했다. 학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가끔 아파서 누워있는 엄마 모습을 보는 게 참 싫었었다. 어렸던 나는 엄마의 병이 마음에서 온 것이라는 생각을 당연히 못했고, 단지 내 일상이 깨지는 불편함이 싫었을 것이다. 


 밭에서 채소를 가꾸는 것 외에, 경제적인 활동으로 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곳이라, 엄마의 무기력감과 외로움 그리고 빈곤은 그녀 삶을 서서히 억누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살아오면서 딱 한번 아버지에게 맞은 기억이 있다. 불면증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엄마는 밤이면 잠들기 위해 노력을 하셔야 했다. 그런데 막내 동생과 내가 티격태격 옆방에서 싸움을 하는 것을 듣고, 아버지는 마루에 놓인 훌루 후푸를 반으로 접어서 우리 둘에게 한 대씩 휘날리셨다. ‘네 엄마가 잠자야 하는데 너희가 떠들어 잠을 잘 수 없다. 조용하게 자거라’라는 말과 함께 방문을 닫고 나가셨는데, 살면서 그렇게 아픈 매가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당연히 동생과 나는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은 척 잠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그래도 '엄마를 아끼시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자신을 자신의 마음대로 이끌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친구를 너무 좋아했고, 집보다는 밖이 좋으셨던 아버지를 엄마는 본인의 사주에 있는 ‘역마살’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셨지만, 이 또한 엄마가 아버지를 감싸는 또 하나의 주문 같은 거였던 것 같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한다. 하루의 삶이, 한주의 삶이, 한 달의 삶이, 그리고 일 년의 삶이 인생이다.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이루어 낼 수 있을지를 함께 생각하며 글을 써간다. 노년의 삶을 살아가시고 있는 부모님이 나란히 자식들과 여행하고 찍은 사진을 보면서 어느 순간 이렇게 나이가 드셨다는 것에 놀란다. 시간과 삶 앞에서 겸손해져야 함을 알 것 같다. 지금 어느 위치에 있던지 우리에게도 노년이 올 것이고, 그리고 인생 무대의 막을 닫을 날이 올 것이다. 


 농부의 마음을 가져 본다. 씨를 뿌리듯 살아야 하고, 그러면서 물도 주고, 비바람도 막아 주고, 햇볕을 보여 주면서 기다리다 보면 삶이 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지금 최고의 노년을 보내고 계신 부모님을 보면서 지나온 길에 어떤 씨앗을 심으셨는지 보인다. 어제 아버지가 엄마 걱정이 되어서 전화가 왔다. '니 엄마 일 좀 못하게 니가 말 좀 해라. 지금 옆구리가 결린다고 또 병원 갔다.' 사람인(人)자 처럼 이렇게 서로를 의지하고 사랑하시는 모습에서 두 분이 가꾸신 노년의 화원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낀다.


 하얀 눈이 쌓인 길을 걸어갈 때는 조심스러워야 한다. 왜냐하면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첫 사람의 발자국은 길이 되기 때문이다. 흰 눈 위를 걷는 마음을 엄마는 아셨다. 자신이 흐트러진 길을 걷는다면, 그 뒤를 따라오는 자식들도 잘못된 길을 갈 것이라는 것을. 


힘들고 외롭고 지칠 때 도망치고 싶을 만큼 삶은 그녀에게 살벌했다. 주머니에 든 돈은 없고, 낮에는 밭일에 밤에는 들어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석 같은 삶을 살아낸 그녀. 당신이 있어 내가 있고, 우리 자식들이 있다. 쓰면 쓸수록 그 살아낸 그녀의 삶이 더욱 값지게 보인다. '당신이 인내하고, 참고 살아온 삶의 본보기가 있는데, 어찌 자식들이 나쁜 길로 빠질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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