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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윤효 May 26. 2024

내 사랑, 고여사!

5. 기억 속의 머슴

먹고사는 일에 긴장감이 들 때, 좀 더 편하게 살고 싶은 감정은 사치가 된다. 한 해의 목표가 쌀농사 잘 지어, 필요한 양식을 곳간에 넉넉히 채우고, 그리고 조금 여력이 된다면 의식주에 필요할 수 있는 것들을 구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 마음은 주름진 옷을 펴듯 삶의 멋을 내고 싶어 진다. 그리고 편안한 삶을 꿈꿀 수 있다. 


 삶의 긴장감을 지나 풍족함을 원하는 엄마의 기준은 조금씩 높아져 갔다. 큰아버지들은 동네 남자들이 선택한 농사가 아닌 소장사를 하셨다. 자연스럽게 아빠도 형제들을 따라다니며 소장사를 하셨다고 한다. 농사보다는 장사가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었기에 큰집들은 동네에서 꽤 잘 사는 집이었다. 큰엄마들과 머슴들은 농사를 짓고, 큰아버지들은 소장사를 해서 집으로 들어오는 수입구조가 탄탄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욕심이 없던 아빠의 소장사는 큰아버지들에 비해 수입이 많이 적었다고 한다. 


 주위 형제들이 잘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 만큼은 살아야겠다는 강한 동기가 생겼던 엄마는 논 20마지기를 만들기 위해 악착같이 일했다고 한다. 농사는 정직하게 온몸을 바쳐 시간의 힘과 인내의 힘이 필요한 일이다. 남편의 도움 없이 농사를 지어야 했기에, 남자 몫까지 해내는 힘이 엄마 안에 생긴 시기였다. 농촌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오로시 농사 밖에 없던 시절, 몸이 건강한 가난한 사람들은 남의 집 농사를 돕고, 소 풀을 베고, 나무감을 베어다 주는 머슴 생활이 부끄럽지 않던 시대였다. 아빠의 큰 도움은 없었지만, 머슴이라는 공동체적 형태가 있어서 엄마 혼자서 농사를 꾸려 나가는 것에도 탄력이 붙었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 일했던 머슴이 기억에 남는다. 항상 남색 잠바를 입고 있던 그는 종종 수염이 덜 깎인 상태로 웃음이 없던 사내였다. 옷에 묻어있던 먼지나 얼룩을 털어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그는 말수가 적었고, 웃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었다. 노동을 통한 삶의 생기를 품어내던 다른 어른들과 달리 그는 감정까지 말라버린 사람처럼 보여서 어린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어린 내 마음에서 묘하게 전해져 오는 그의 슬픈 눈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머슴의 품삯은 1년에 쌀 다섯 가마니 정도였다고 한다. 엄마가 농사를 짓는 동안 몇 명이 차례로 우리 집 머슴 살이를 했다고 하는데 2년 전에 우리 집을 찾아오신 일호 어머니도 남편이 우리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었다고 한다. 그녀는 ‘엄마가 아니었으면 굶어 죽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시면서, 엄마가 청소하기 힘든 집안 구석구석 청소를 해주셨다. 그리고 고구마, 수박, 고추등을 집으로 보내 주셨다. 덕분에, 나도 덩달아 그녀가 보내준 고구마로 아침 한 끼를 해결하기도 했다. 


 눈먼 시아버지와 아이들 셋을 나아 남편과 하루 벌어 하루살이를 했던 일호 어머니는 우리 엄마를 은인처럼 대하신다. 당시, 모심을 시기가 되거나 가을 수확철이 되면, 시골의 일손들은 바빠진다. 남자들은 여자들에 비해 품싹이 2배가 비싸 엄마는 자신이 남자가 하는 일을 하고, 일호 어머니는 함께 일할 아줌마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 오시곤 했다고 한다. 10명에게 품삯을 주어야 할 때는 엄마는 항상 11명 분의 품삯을 주셨고, 7명 정도가 와도 8명 분의 품삯을 일호 어머니께 주셨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일호 어머니는 농사철이 되면 제일 먼저 우리 집일을 우선순위로 두었고, 다른 동네사람들에게 불평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하루 농사일을 거들어 주면, 일이 끝나고 돌아갈 때 양판에 일한 사람의 밥을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일호 엄마의 집안 사정을 알았기에 양판 한가득 밥을 퍼주셨다. 다른 집들이 주는 양판의 밥으로는 온 가족이 밥을 나눠 먹기는 어려웠으나 우리 집 일을 도와주고 나면 엄마가 퍼주신 밥으로는 온 식구가 밥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가 아니었으면 굶어 죽었을 것이라고 말을 하신 것이다. 


 지난여름 며느리와 함께 우리 집을 찾아온 그녀를 만났다. 편안한 노년의 삶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내야 하는 삶을 살고 계신 그녀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남편의 폭행이 심해져 그와 떨어져 홀로 살기 위해 오신 것이다. 시골에는 여전히 일손이 부족하다. 70이 넘는 나이지만 몸이 건강하셔서 차를 따는 일을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배움이 부족하고, 어떻게 살아야지 하는 마음먹을 세도 없이, 살기 위해 온몸을 쓰다 보니 노년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그녀를 보며 엄마는 여러 조언을 해주셨다. 돈에 너무 욕심 내지 말고, 자식들에게 필요 이상의 금전적 도움을 주면 독이 된다는 것과 자신의 건강을 최우선 순위로 두라는 것이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일하기 전에 ‘화전놀이’를 했다고 한다. 각 집에서 모은 돈으로 음식을 장만해서, 강가나 풍경이 좋은 곳에 가서 꽹과리, 장구, 북을 치면서 노는 것을 화전놀이라 불렀다. 농사의 기본은 협력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끼리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요즘 말로 하면 단합대회를 하신 것 같다. 조상들의 지혜가 ‘화전놀이’를 만들어 낸 것 같다. 모를 심으면서, 가을 수확철에 벼를 탈곡하면서 함께 부르던 노래들이 시대가 변하면서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 


 남자 몫까지 해내는 엄마의 생활력은 아빠로 하여금 한발 뒤로 물러나게 만드신 것 같다. 굳이 몸으로 육체노동을 하지 않고도 장사를 통해 돈을 버시다 보니, 아빠는 농사일은 뒷전이셨다고 한다. 

어느 날 보리를 수확하고 저녁 식사 후 6시부터 다음날 6시까지 꼬박 12시간 동안 40 가마니의 보리를 타작해야 했다고 한다. 8명이 한 조가 되어, 보리볕을 풀어 주는 사람, 다 타작이 된 보리를 묶는 사람 그리고 보리 알갱이를 주어 담고 창고로 옮기는 사람들이 2인 일조가 되어, 4팀이 일해야 했다고 한다. 엄마와 한 팀인 아빠는 저녁식사 후 나가시더니 들어오시지 않으셨다고 한다. 


 작은 큰엄마가 우리 집에 오셔서, ‘정숙이(언니 어릴 적 이름) 아버지가 우리 집에서 자고 있네. 내가 얼른 가서 깨워 보낼게.’ 작은 큰엄마가 우리 집에서 보리타작을 한다는 것을 아시고, 밤 10시에 아빠를 깨워 집으로 가시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빠는 하루 종일 엄마와 보리를 수확해서 몸이 피곤하시다고 다시 큰 큰집에서 가셔서 다음날 아침까지 주무시고, 보리타작이 다 끝난 후에 집으로 들어오셨다고 한다. ‘이제, 일 다 끝났는가?’라고 말하면서 집으로 들어오시는 아버지를 보고, 밤을 새워 보리타작을 했던 엄마는 그 모습이 그렇게 야속해 보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농촌은 가을 수확철이면 몸이 열개라도 부족한 시기다. 그 가을에 전국 체전을 보러 가신다고 아침에 나가신 분이 다음날 저녁에 집으로 들어오신 아버지는 약간은 철없는 청소년처럼 보이셨다고 한다. 엄마눈을 피해 요리조리 일을 피하기만 하는 남편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로, 머슴의 힘을 빌려가면서 서서히 논을 사들이셨다고 한다. 20마지기라는 목표가 희망이 되어 그녀 삶에는 그래도 활기가 있던 시기였다.


 피레네 산맥의 지도를 가지고 알프스 산맥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을 다룬 영화처럼, 희망이란 그 어떤 장벽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준다. 삶이 어렵다면, 혹시 우리에게 희망이 없어서 일 수 있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꿈은 어떻게 보면 희망을 주는 등대일 것 같다. 삶의 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누구나 폭풍도 만나고, 비도 만나고, 온 마음이 뒤흔들리기도 하지만, 찬란한 햇살도 만난다. 그러나 그 망막한 대해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꿈의 등대는 앞으로 나아갈 희망을 주는 것 같다. 그래서 온몸을 다해 꿈을 꾸고, 희망의 노래를 불러내야 한다. 남이 불러주는 노래가 아닌 스스로 불러내는 희망의 노래를...... 


 일에 온통 정신이 빼앗긴 엄마지만, 가끔 시장에서 사 온 헌 옷들로 멋 부리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으셨다. 키가 크고 날씬하셔서, 엄마가 입었던 옷들은 주위 아줌마들에게 심심치 않게 부러움을 샀다. 비싼 옷이라고 오해받기도 했지만, 대부분 옷을 보는 안목이 높은 엄마가 산 헌 옷이었다. 이 시기에 엄마는 새 옷을 거의 사본적이 없으셨다고 한다. 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로는 엄마옷은 색상이나 디자인은 예뻤는데 구멍이 난 옷을 입으시기도 했다고 한다. 언니는 그게 속상해서 자신이 커서 엄마에게 예쁜 옷을 많이 해드려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언니는 의상학과를 들어갔고, 언니의 어린 시절 결심처럼 엄마에게 멋짓 옷들을 많이 선물 했었다. 내가 여고 시절 하숙을 하던 때, 엄마는 언니가 해준 한벌의 멋진 정장을 입고 학교를 온 적이 있었다. 반 친구들이 ‘네 엄마 참 멋지신 분이네?’라는 그 한마디 표현이 여전히 내 가슴속에 뿌듯함으로 남아 있다. 


큰 어마들이 철마다 한복을 해 입고, 모피를 사 입던 시절 엄마는 자신의 가장 힘든 시기를 어렵게 걸어 나가고 계셨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핑크빛 원피스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엄마가 내게 사주신 그 분홍 원피스가 예뻤던지 우리 윗집에 사는 내 친구 정아 엄마가 욕심을 냈다. 그래서 엄마는 분홍 원피스를 정아에게 주고, 나는 남색과 빨간색이 들어간 원피스를 새로 사주셨다. 내 옷을 입고 있는 정아를 보면서, 아깝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기억이 있다. 집 앞으로 흘러내리는 개울 앞에서 둘이서 손을 잡고 찍은 사진을 어려서 봤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시골의 일상은 바쁜 듯 하지만, 나름 낭만과 즐거움이 곳곳에 숨어 있다. 담너머로 ‘00 댁’이라고 부르고 서로 나눠 먹는 음식들이 있었고, 농사철이 되면 돌아가면서 서로의 논에서 품앗이 일을 해주고, 설이나 추석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평소 먹기 힘들었던 튀김이나 떡을 만드는 소리가 노래처럼 흘러내리던 곳이었다. 구례로 이사 나오기 전까지, 복기미에서 보낸 10년은 엄마에게 있어서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으나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운 시기였을 것 같다. 목표가 있었고, 젊음이 있었고, 좋은 이웃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자식 낳고 남편과 알콩 달콩 살아도 꽤 괜찮을 것 같은 인생이 그녀를 위해 기다리는 듯 했으리라. 


 하지만, 서서히 다가오는 불행의 그림자는 젊은 엄마의 근심을 키워갔다. 큰 아버지들과 아빠는 소장사를 하면서, 소를 팔러 갔다가 들어오실 때는 늘 함께 차를 타고 오셨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빠는 읍내 친구들과 놀고 온다고, 집으로 들어오시지 않는 날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엄마는 집 앞에서 차소리만 나도 혹여 아빠가 오시나 싶어서 신경을 쓰는 날들이 많아졌다. 언제 들어오실지 모르는 아빠를 위해 늘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준비해 두셨던 엄마는 남들도 모르게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셨을 것이다. 


 답답한 엄마는 용하다는 점쟁이 집을 3군데나 찾아 나셨다고 한다. 3명 모두 이구동성으로 엄마 신세가 ‘꿩 떨어진 매가 될 수 있다’(아빠에게 쓸모없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는 뜻인것 같다.)고 아빠를 따라 읍내로 이사를 하라고 했다고 한다. 엄마가 목표로 잡았던 20마지기 논은 만들어 내지 못했지만, 19마지기 논을 모두 팔아 구례읍에 정착을 하기로 결심하셨다고 한다.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앞, 뒷집에 아이들끼리 친구가 되고, 언제든 누구 집이든 놀이터가 되었던 수반 동네에서, 어른들끼리 잘 도와주고 정이 많았던 복기미 생활에 길들여진 엄마는 구례라는 외딴 섬 같은 곳을 아빠를 위해 선택하셨다고 한다. 주위에 이웃이 거의 없는 양정 마을은, 소, 돼지, 닭을 키우기는 사람들이 정착해 살고 있는 마을로 읍내와 떨어져 있었다. 집 주위로 800평 정도의 밭이 둘러 쌓여 있고, 소나 돼지를 키울 수 있는 축사가 유일한 이웃이었다. 어릴 적 학교 다닐 때 겨울이면, 성난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왜 그리 멀었던지... 그런 외딴곳의 엄마에게 어린 자식들과 남편을 기다리며 온몸으로 또 다시 밭일을 해내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엄마가 양정 마을로 이사 간다고 하셨을 때, 많이 말리셨다고 한다. 사람도 거의 살지 않고, 모래땅 같은 곳에서 앞날이 창창한 자신의 딸이 아이들 데리고 고생하면서 살 것이 눈에 빤히 보여서였을 것이다. 읍내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나는 아빠의 기억이 거의 없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빠가 내 기억 속으로 들어올 만한 추억을 주시지 못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오로시 엄마와 언니오빠만이 내 기억 속 앨범을 차지하고 있다. 


 간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사람들 속에서 ‘하하 호호’ 웃으며 노동의 맛을 보시면서 사시던 엄마는 드디어 구례읍 양정 마을에서 30대 초반의 나이로 다시 시작하신다. 그녀에게 살아낼 시간이 큰 장벽처럼 떡 버티고 있었다.   


 책을 써내려 가면서 나도 모르게 우울감이 올라왔다. 엄마의 그 시절 그 감정을 느껴보고자 조금 몰입을 해서 그런가 보다. 농사를 다 내려 두시고, 자신의 보조 역할을 했던 머슴도 내려 두시고, 덩그러니 사막 같은 곳에서 온몸으로 비를 맞고 서있었던 젊은 엄마를 지금 만난다면 가만히 안아 주고 싶다. 다음 편에서는 구례에서 자식들과 외롭고 고독하게 홀로 일하는 일상을 써내려 갈 것이다. 딸로서 엄마를 보기보다는 같은 여자로서 그녀의 삶을 보려 하니, 가슴 한 구석이 아련히 아파온다. 그래도 삶은 소리소문 없이 흘러가고 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화전놀이 중, 아빠가 장구를 매시고 흥을 돋우시는 중.......>

< 할아버지 3년상이 지나고, 당시 유행하던 파마머리를 하실 수 있으셨던 엄마가 동네 아낙들과 한껏>

<큰 오빠를 보기 위해 부산에 가신 엄마, 아빠가 함께 찍으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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