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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윤효 May 19. 2024

내 사랑, 고여사!

4. 동내 유일한 슈퍼

시집에서 2년 가까이 살다가 드디어 독립을 하게 된 엄마 아빠의 새 보금자리는 아랫동네 복기미와 윗동네 흥대 중간에 위치한 작은 집이었다고 한다. 큰 큰아버지가 2만원, 작은 큰아버지가 1만원 그리고 아빠가 모은 돈 1만원으로 4만원 짜리 집으로 이사를 나가신 것이다. 방 2칸에 마루도 없는 집이었지만, 집 뒤에 있는 홀에 가게를 하던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엄마는 간판도 없이 가게를 시작하시게 된 것이다. 


 첫째 큰아버지는 논 22마지기, 둘째 큰아버지는 논 13마지기를 물려받아, 두 분의 집은 살림살이가 넉넉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 몫으로는 1마지기 땅만 받았으니, 독립은 했으나 먹고살기 위한 긴장감이 드셨을 것이다. 


땅은 농촌 사람들에게 생명의 줄기다. 그 땅 위에 곡식을 심고, 정성을 들여 넉넉히 수확을 거두는 일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시대였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조금 더 넉넉하게 땅을 물려받으실 수 있으셨겠지만, 욕심도 없는 아빠는 결혼 전 자신이 산 논조차도 큰 집 소유로 넘겨주고 오신 분이니 엄마는 자식들을 위해 강해 질 수밖에 없으셨으리라. 


 당시 흥대마을과 복기미 마을의 유일한 엄마 가게는 제법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5일마다 읍내에 있는 ‘무궁화 상회’에서 5,000원 상당의 장을 보아 왔다. 더 사고 싶어도 보따리 안에 엄마 머리로 이고 올 수 있는 최고치 액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머리 위에 이고 30리 길을 오가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에는 읍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버스가 없어서 배를 타고 들어왔어야 했다고 한다. 읍에서 배 타는 곳까지 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버스 값 15원이면 다음 장날 그 돈이 30원이 되어 주머니 속으로 들어오는데 차마 탈 수가 없으셨다고 한다. 보따리 가득 물건을 채우고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옆에서 누가 거들어 주어야 머리에 이고 설 수 있는 그 짐이 그녀에게는 삶의 희망이었다. 


 5,000원이 다음 장날이 되면 10,000원이 되는 요술 같은 과정을 아는 지라 힘이 들어도 힘든 줄 모르셨다고 한다. 빨리 일어나 큰집들처럼 자식들 밥 굶길 걱정하지 않고 살기를 바라셨던 엄마의 또 다른 몰입의 시간이었다. 아침 일찍 장에 가셔서 물건을 사고, 점심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를 보면서도 15원이면 다음 장날 30원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침을 삼키며 주린 배를 움켜쥐었다고 한다. 막 빼낸 그 하얀 국수가락이 얼마나 맛있어 보였던지 마음속에서는 매번 갈등이 일어나셨다고 한다. 하지만 보면서도 사 먹지 못하셨다고 한다. 시골 장날의 풍경은 마치 큰 잔칫날 같다. 여기저기에서 모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물건을 사기도 하고, 여전히 쌀이나 보리로 물물교환하고, 전이나 주념부리(과자)를 맛보는 시골장은 지금도 삶의 소리로 요란하다. 어릴 적 장에서 엄마가 한 번씩 사주셨던 번데기의 고소한 향기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있다. 장에서 만난 아줌마들끼리 수다를 떨던 그 정겨운 풍경이 요즘 마트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사람 냄새가 가득한 공간이었다. 떠돌이 장사꾼들이 어김없이 5일이면 그 자리에 나타나는 것도 신기했다. 온라인으로 쇼핑하면서 시간도 절약하고, 불필요한 충동구매에서 벗어날 수 있어 좋기도 하지만, 가끔은 사람사는 냄새가 가득한 그런 시골 장터가 그리워진다.


 돌 지난 언니를 등에 업고, 오빠를 임신해서 배는 남산만 한데, 머리에는 커다란 짐봇다리를 매고 있는 20대 초반의 꽃다운 엄마는 그렇게 서서히 억척이 되어 갔다. 제주도 여행에서 엄마 같은 모습의 여인상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돌상을 쓰다듬으며, ‘네가 꼭 내 젊은 날 모습 같다’라고 혼자 웃으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흔히 아줌마들을 억척스럽다고 쉽게 이야기한다. 내 자식 배 굶기지 않고, 잘 먹이고  싶은 그 모성애 앞에서 여자라는 명패를 버리고 엄마라는 이름으로 삶을 대하다 보면, 누구나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말 중 하나가 ‘엄마’라는 이름인 것 같다.


 당시, 두 마을에는 젊은 총각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쌀이나 보리를 들고 와서 술이나 과자를 제법 잘 사 먹었다고 한다. 당시 소주는 큰 대병으로 나왔던 시대라 한잔씩 팔면 그냥 파는 것보다 2배의 이익이 되었다고 한다. 새로 나온 라면도 인기가 좋아, 끓여주면 2배를 받았다고 하니 얼마나 신이 나셨을까. 가부장적인 외가댁에서 일만 하며 돈 버는 방법도 모르고 살다가 시집와서 처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버는 재미는 삶의 생기를 불어 넣었을 것이다. 엄마의 가게는 그렇게 주인을 잘 만나 활기가 도는 공간이 되었다. 다들 살림살이가 빠듯할 때라 맘 놓고 쉽게 물건을 사지 못하던 시절, 그나마 동네 가게에서 값싼 과자나 라면은 일상에서 행복을 주는 요소였으리라. 어린 시절 종합 과자세트를 선물 받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다양한 과자가 예쁜 봉지에 담겨 내손으로 들어올 때의 그 행복감이란...... 아껴두고 하나씩 하나씩 먹다 보면 어느새 통이 텅 빌 때 그 허전함이란...... 지금처럼 먹는 것이 풍족한 시대에는 겪어 보지지 못할 마음의 맛이다.


 언니는 또래 아이들보다 말을 빨리 했다고 한다. 가게만 열어 두고 밭으로 논으로 잠깐씩 일을 하러 간 사이에 혼자 가게를 지키던 3살도 안된 언니가 누가 물건을 가져갔는지 말을 해주었다고 하니, 큰 딸에 대한 엄마의 무한 신뢰는 그때부터 만들어졌다. 외상으로 사 먹기고 하고, 돈 대신 곡물로 가져다주기도 하고, 때론 주인이 없어도 물건을 가져가고 다음날 돈을 가져다주는 그런 순수한 시대였다. 


엄마가 가게를 지키다가 밥을 하러 부엌으로 가면, 친할머니는 엄마의 가게로 들어와 치마 속에 이것저것 숨겨서 들고 뒷문으로 살짝 빠져나가시곤 하셨다고 한다. 앞문으로 들어오셨다가 뒷문으로 살짝 빠져나가시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할머니를 언니는 졸졸 따라 다니면서 감시 아닌 감시를 했다고 한다. 그래도 한 번씩은 할머니를 놓치고 나면, ‘엄마, 할머니가 치마 속에 물건 넣어 갔어’라고 일러 주기도 했다고 한다. 어린 마음에도 자신의 집에서 무엇인가를 들고 가는 할머니를 감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니, 사람들이 왜 큰 딸을 살림 미천이라 불렀는지 알 것 같다. 시골말로 ‘실겁다’라는 말은 요즘말로 하면 의젓하고 슬기롭다는 말이다. 언니는 아직도 엄마로부터 ‘실겁다’라는 말을 듣고 있다. 나는 언제 ‘실겁다’라는 말을 한번 들어볼까...... 나이가 들어도 엄마로부터 듣고 싶은 말이 많다. ‘더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은 어린 시절 형제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누구가 가지고 있는 마음 아닐까. 


 당시, 여자들은 결혼을 하면, 이름 대신에 그녀들이 아가씨 때에 살다 온 지역 이름을 넣어 ‘00 덕’이라는 호칭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의 호칭은 ‘수반덕’이다. 엄마의 고향이 수반이라는 동네였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자신이 몰래 들고 나온 물건들을 근처 사는 가난한 ‘청내덕’(청내에서 시집온 사람)에게 주셨다고 한다. 자신을 위한 욕심이 아니라 못 사는 사람들이 안쓰러워 자식들 집에서 물건을 가져다주시는 그 품성에 어찌 욕을 할 수 있을까. 어릴 적 할머니와 제대로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말씀이 적으셨고, 하회탈 같은 반웃음을 마치 지금의 마스크처럼 늘 얼굴에 쓰시고 다니신 분이셨다. 


 엄마의 장사는 바람 만난 불처럼 활활 잘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4년을 넘게 열심히 일한 결과 10마지기의 논을 사실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리한 엄마는 아빠의 불편해하는 안색을 놓치시지 않으셨다. 젊은 청년들이 가게에 와서 술 한잔하고 희희낙락거리는 모습에서 질투를 느끼셨던 것이다. 엄마는 그때 장사가 아무리 잘되도 부부관계가 나빠진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셨다. 10 마지 정도 논이면, 세끼들 데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기반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그래서 방 3개에 너른 마당이 있는 집, 노부부가 살고 있는 아랫동네 복기미에 가셔서 협상을 하셨다고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부부가 큰 집에 사는 것보다 5일마다 물건 때다가 두 동네를 상대로 장사를 하시는 게 더 낫다고 두 집을 바꾸자고 하신 것이다. 처음에 그 노부부는 동요를 하시지 않으시다가, 엄마가 제차 부탁하고, 중개인이 잘 나서서 도와주자 드디어 그녀는 원하는 집에서 살게 되었다. 얼마나 신이 나셨을까. 그것도 복기미에서는 두 번째로 좋은 집이었다고 한다. 제대로 된 자신의 집을 처음으로 산 사람들은 알 것이다. 행복으로 배가 불러오는 느낌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너른 마당과 대문 앞에 감나무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늘 깨끗하게 쓸려 있던 마당과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널찍한 마루는 걸터앉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마루를 쉽게 올라가기 위해 큰 디딤돌이 있었고, 나는 그 디딤돌 뒤로 동네에서 주어온 곧고 예쁜 대나무를 숨겨 두기도 했었다. 하지만, 다음날이면 내가 주어온 대나무가 왜 자꾸 사라졌는지 궁금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침마다 소 여물을 삶아 주시던 아빠가 불쏘시게로 쓰신 것 같다. 자연의 놀이터인 마을 언덕들에서 돌이며, 손에 잡기 매끄러운 곧은 대나무는 천연 장난감이었다. 자연이 놀잇감이 되는 그 시절의 맛을 우리 아이들에게서 빼앗아서는 안된다. 어른이 되어 돌아보면 이렇게 다양한 감성의 맛을 주는 추억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집 한쪽 벽이 큰길을 향해 있어, 가끔 나라에서 나온 포스터가 붙어 있어 마을의 소식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동네에 벽보가 붙어있으면 오빠들이랑 그 그림과 글자를 물끄러미 봐라 봤던 기억 있다. 어린 나는 글자를 읽지 못해 그냥 큰오빠가 읽어 내려가는 것을 듣곤 했는데, 가끔 큰오빠의 거짓말은 나를 긴장시키기도 했었다. 한날은 큰오빠가 ‘말 안 듣는 애들을 잡으로 온다’라는 얼토당토 안 한 말에 놀라 집으로 얼른 들어가 숨어있던 기억이 있다. 콩닥콩닥 조막 만 한 가슴이 뛰었던 그 느낌이 나이가 들어도 기억나는 게 신기하다. 


 아랫동네 복기미에서 조금 넉넉해진 살림이 정착되자, 우리 집에 서서히 검은 먹구름이 들었다. 세상일에는 항상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 온다. 엄마가 장사를 그만 둔지 1년도 되지 않아 각 동네마다 ‘조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공동 가게가 생겼다고 한다. ‘조리 자금’이란 동네 자체로 가게를 운영하고, 그 돈으로 동네에 필요한 공공시설이나 물품 등 그 마을을 위해 쓰는 자금을 말한다. 안타깝게도, 엄마로부터 가게를 인수받으신 분들은 가게의 수익금이 많이 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돈이 잘 벌리는 상태에서, 멈출 줄 아는 엄마의 지혜가 돋보인다. 밀엽꾼들이 원숭이를 잡는 방법 중 하나가 손만 들어가는 항아리에 땅콩을 넣어둔다. 땅콩에 욕심이난 원숭이는 손을 뻗어 항아리 안 땅콩을 움켜쥔다. 그러나 움켜쥔 상태로는 항아리에서 손을 뺄 수가 없다. 그 땅콩에 욕심이 난 원숭이는 항아리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그 사이 밀렵꾼들이 항아리에 손이 낀 원숭이를 손쉽게 잡는다고 한다. 인간의 욕심도 이와 같다. 조금더 하는 마음에 더 깊이 빠져 들 수 있다. 엄마의 절제력 덕분에 큰 손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잠깐의 행복도 찰나, 엄마에게 서서히 인생 비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로서, 엄마로서의 삶을 뒤따라 걷고 있는 나는 그녀의 인생 여정을 글로 써가는 과정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심도 있는 공부를 하는 학생이 된다. 시험은 없지만, 막연한 긴장감이 든다. 이렇게 살다가 노년을 맞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무엇을 남겨 줄 수 있을까. 순간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손안에 든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 누구도 알려 주지 않는다. 오로시 내 손에 달려 있다. 만약 누군가, 어느 날 일억 원을 건네주며 오늘 안에 사용하라고 한다면, 마음은 바빠질 것이다. 무엇을 살까, 어떻게 가치 있게 쓸까라는 기쁜 마음으로 행복한 고민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이 주신 24시간의 가치를 매일 배송받고 있는 지금 과연 우리는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이 있던가? 시간을 흘려보내지 말고 큰돈을 쓰듯, 하루를, 일주일을 그리고 일 년을 지혜롭게 아끼듯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엄마의 삶을 써 내려가면서 과거 그녀의 감정과 느낌을 교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삶을 내가 살아봐야겠다. 젊음 그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에 오천 원짜리 티만 입어도 이쁘다고 했던 엄마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젊다는 것 자체가 명품옷인데, 가끔 잊었다. 내가 그녀의 생각과 삶의 희로애락을 다 담아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편을 조용하게 접어 본다. 


<디딤돌 뒤에 내가 숨겨둔 대나무가 보인다. 동생과 나 그리고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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